“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 없어졌습니다.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떠돌아다닙니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숨겨둡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당신의 교만과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야심을 버리십시오. 그러한 것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만과 욕망, 위선적 모습과 야심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누구에게 하는 충고인가? 뜻밖에도 공자에게 하는 충고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에게 충고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노자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의 충고를 기록했다. 아울러 충고를 받은 공자의 반응 또한 기록했다.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는 잘 날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고 짐승은 잘 달린다. 나는 새는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하여 낚을 수 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다.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공자는 노자를 가리켜 ‘용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 공자는 노자에게 감명받은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만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공자의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새나 물고기, 짐승을 예로 든 것으로 보아 공자는 노자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용이라고 했다. 용은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을 어떻게 잡겠는가. 또한 용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노자가 자기주장을 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요즘 말로 하면, 공자가 볼 때 노자는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노자를 용이라고 한 것은 감명의 표현이 아니라 비판이었다.
후대에도 공자의 제자들은 노자를 비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였다. 주희는 불교와 함께 노자의 사상을 매우 위험한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불교와 노자 사상에 대한 비판을 일생의 사업으로 여겼다.
주희가 노자를 비판한 이유는 생각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많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주희는 노자와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교와 노자 사상을 혼동할까 우려했다. 그래서 더욱 엄격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자도 비판하고 주희도 비판했지만, 정작 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노자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중국 당나라 때 황제들이 노자의 사상을 권장했다. 노자의 성씨가 ‘이’이기 때문에, 같은 이 씨인 당나라 황제들이 노자의 사상을 권장했다는 것이다. 노자의 본명이 ‘이이’였다는 것에서 유래한 얘기인 것 같다. 그러나 ‘이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임에도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도덕경>이라는 책 때문이다. <도덕경>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전해온다. 노자가 중국 주나라에 살다가 주나라가 몰락해가는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함곡관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 관리인 윤희라는 사람이 노자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선생님께서 지금 은둔하시려는 것 같은데,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한 편 써주십시오.” 노자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5000여 자의 글을 써주고 떠났다고 한다.
그 글이 <도덕경>이라는데, 일화 자체도 믿기 어렵다. <도덕경>은 한자리에서 단숨에 쓸 수 있는 내용의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자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어쨌든 한 권의 책이 남았으니 그 책에 집중해보자.
<도덕경>은 후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오죽하면 주희 같은 대가가 일생을 두고 비판했겠는가. 주희가 비판했다고 모든 성리학자가 <도덕경>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이는 <도덕경>에서 2098자를 뽑아 40장으로 이루어진 <순언(醇言)>을 지었다.
‘순언’이란 ‘좋은 글’이란 뜻이다. 따라서 <순언>에는 <도덕경>에서 옳지 않은 내용은 빼버리고 옳은 글만 뽑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이가 성리학자임을 감안하면, 유교의 입장과 일치하는 부분을 좋은 글이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글로 책 한 권을 구성했으니 노자의 사상이 유교와 많은 부분 일치했음을 알 수 있다.
<도덕경>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도(道)’와 ‘덕(德)’에 관해 쓴 책이다. 도는 천지만물의 권원(權原)을 나타내는 말이다. “도가 1을 낳고, 1이 2를 낳고, 2가 3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한 도는 천지만물의 원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1을 낳고 2를 낳고 3을 낳는 과정에는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다. 그것이 천지만물의 원리인 도다.
그러면 덕이란 무엇인가? 도에 따라 사는 게 덕이다. 즉 자연을 본받아 사는 게 덕이라는 말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고, 자연의 순리대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을 ‘무위의 삶’이라고 했다. 무위(無爲)는 <도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말로서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순리대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도덕경>에서 무위의 삶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보자. “발끝으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황새처럼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발바닥을 땅에 대고 서 있어야 오래 서 있을 수 있고, 평소의 발걸음처럼 걸어야 오래 걸을 수 있다.
그래서 무위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다음의 말을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몸을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추우면 히터를 틀고 몸은 움직이지 않고,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몸을 움직인다. 무위의 삶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도덕경>에서는 순리를 거스르는 것을 ‘유위(有爲)’라고 했다. 유위란 ‘무언가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삶은 무언가를 하는 삶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순리대로만 살지 않는다. 히터를 틀고 에어컨을 켜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래서 <도덕경>에서는 유위의 삶을 경계한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무위가 곧 유위다”라고 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존재다. 그때 순리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라고 한 말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억지 주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 가지 말, 한 가지 행동도 순리에 맞는지 생각해보며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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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 <한국 철학 콘서트>,<철학자의 조언>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