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딜링햄 부부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금시계이고, 또 하나는 아내의 기다란 금빛 머리칼이죠. 만일 솔로몬 왕이 이웃에 살고 있다면, 남편은 왕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시계를 꺼내 보며 부러워서 수염을 쓰다듬는 솔로몬의 모습을 즐겼을 것이고, 아내는 창문 밖으로 머리채를 늘어뜨려 시바 왕비의 화려한 보석과 뛰어난 미모를 무색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가난한 부부는 서로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금시계에 어울리는 은빛 시곗줄을 선물했고, 남편은 아내에게 빗을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빗을 사기 위해 금시계를 팔았고, 아내는 백금 시곗줄을 사기 위해 아름다운 머리칼을 잘라 팔았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줄거리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죠. 중학생 시절 배우 고 김자옥 씨가 목소리로 출연한 MBC 라디오 극장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이불 속에서 한참 울었습니다. 슬픔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의 처사에 화가 났거든요.
‘그깟 빗을 하나 사려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금시계를 팔다니. 스물두 살이면 어린 나이가 아닌데 그렇게 분별이 없다니. 또 금시계를 팔고 빗을 샀다면 그 차액이 꽤 될 텐데, 왜 그 이야기는 없는 거야!’
철딱서니 없는 남편에 대한 분노가 풀리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아 읽어보니, 빗이 보통 빗이 아니었던 겁니다. 진짜 거북껍질로 만들고 가장자리에 보석이 박힌 진귀한 빗이었죠. 그때는 빗이 정말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1860년대까지 당구공과 빗, 피아노 건반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상아로 만들었으니까요. 귀한 상아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비쌌고 코끼리는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멸종 위기의 코끼리가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자 상아 공급도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뉴욕의 당구공 업자들은 누구든 상아를 대체하기에 적절한 물질을 가져오면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신문 광고를 냈고, 그것을 본 존 웨슬리 하이엇은 1869년 ‘셀룰로이드’를 발명했습니다.
셀룰로이드로는 최고급 상아로 만든 물건처럼 보이는 모조품을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부자들의 오락이었던 당구가 서민의 오락으로 폭이 넓어졌고, 당시 부잣집 처자들만 꽂았던 장식용 머리빗도 저렴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젠 머리빗을 사기 위해 금시계를 팔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플라스틱은 새로운 사회를 열었습니다. 즉 소비의 대중화와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코끼리도 살아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화학’이라는 단어를 혐오합니다. ‘천연’ 또는 ‘자연’과 반대되는 이미지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천연자원을 공급하는 동식물의 고갈을 막아준 것이 바로 화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플라스틱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죠. 플라스틱은 자연의 파괴자가 아니라 자연의 수호자인 것입니다.
지금 제 책상 위에 있는 물건 가운데 플라스틱 제품은 스마트폰, 스탠드램프, 명함갑, 날클립 케이스, 필통, 볼펜, 에딩 펜, 클립 디스펜서, 아스피린 병, 핸드크림 튜브, 스피커, 크리스마스 실 포장지, 마우스, 칼, 도장, 약 포장, 저금통, 인주 케이스, 물병, 가위, 안경, 안경 갑, 결재서류첩, 탁상달력, 선풍기 리모컨, 키보드, 북마크…. 음, 플라스틱이 아닌 것을 세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으로 일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옷을 입고,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료를 마시며, 플라스틱 차를 타고 움직이고, 플라스틱 가구 속에서 삽니다.
플라스틱은 디자이너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천연 소재로는 도전할 수 없었던 디자인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꿈의 물질이기 때문이죠. 덕분에 우리는 나무나 가죽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의 의자에 앉습니다. 플라스틱 의자가 없다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리는 대통령 취임식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플라스틱 덕분에 가볍고 튼튼한 의자를 쉽게 만들죠.
사람들은 플라스틱은 무조건 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싸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여 플라스틱 생산에도 ‘세계화’가 도입되었고, 평생 해변에서 원반던지기 따위는 해본 적이 없는 노동자들이 프리스비 원반을 생산합니다. 플라스틱 하면 ‘내분비교란물질’ 또는 ‘환경호르몬’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병원 역시 플라스틱 왕국입니다. 주사기와 수액 용기, 각종 튜브를 포함해서 병원에서 사용하는 도구도 대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죠. 낡은 옷은 수선하고, 더 낡으면 해체해서 다른 옷을 만들고, 그래도 더 낡으면 걸레로 썼습니다. 부서진 물건은 수리하고, 부품을 떼어서 보관하고, 고물로 팔았습니다.
그런데 플라스틱이 ‘버리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플라스틱은 괜히 쓸데없는 포장재가 되기도 하고 한 번 쓰고 버리는 라이터가 되기도 합니다. 재활용도 쉽지 않습니다. 플라스틱은 저마다 성질이 다른데 그 많은 종류대로 분리해서 수거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국과 한국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분리된 후 재활용할 수 있는 알갱이로 변해 다시 미국과 한국으로 돌아오는 에너지 고소비 순환계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났습니다. 중국은 더 이상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입할 생각이 없어졌거든요. 플라스틱은 어느덧 버리기도 힘든 물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사막에 홍수가 난 장면을 보았습니다. 맨 모래땅에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갑니다. 그런데 사막의 거친 강물을 가득 채운 게 있었습니다. 바로 페트병이었습니다. 사막에도 사람의 발길이 닿으니 페트병 천지인 것입니다. 지난 2월 스페인 해변에서 향고래 한 마리가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길이 10미터 무게 6톤의 채 다 자리지 못한 수컷이었죠. 사인은 플라스틱이었습니다. 뱃속에서 29킬로그램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왔습니다.
플라스틱 빗은 딸아이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켜줍니다. 플라스틱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가치 있는 물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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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정모는 서울시립과학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 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 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