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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과정을 거쳐 2021년 3월 시민들에게 개방된 딜쿠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독립운동 해외에 알린 테일러 가옥 딜쿠샤
서울 사직터널에서 조금 오르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 보니 권율 장군의 생가 터와 새롭게 단장한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가옥 딜쿠샤가 보였다. 서울 행촌동에 있는 서양식 붉은 벽돌집이다. 1923년 주춧돌을 놓은 서양식 2층 벽돌집 딜쿠샤는 반세기 넘게 닫혀 있었다. 근대 경성 시대에 딜쿠샤에는 서양인이자 해외 통신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다. 2021년 3월 딜쿠샤의 문이 사람들을 향해 다시 열렸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답사하는 사람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이 집에 얽힌 이야기는 남다르다. 이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가족이다. 금광 채굴 사업을 하러 왔다가 조선의 풍경과 문화를 사랑한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와 영국 연극배우 출신 메리 테일러(1889~1982) 부부가 1923년에 지어 일제강점기 말까지 살았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과 독립선언문,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린 해외 통신원이었다. 그가 일제의 눈을 피해 타전한 기사로 우리나라 독립 의지가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1919년 〈AP통신〉의 임시 한국 특파원이었던 테일러는 아들이 태어난 세브란스병원에서 침대 아래 감춰진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3·1독립선언서였다. 테일러는 일본 몰래 그 내용을 국외에 전했다. 그렇게 3·1운동은 세계로 알려졌다. 딜쿠샤 복원은 가옥의 복원이자 항일 민족정신의 복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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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세계에 알린 해외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왼쪽). 앨버트의 아내 메리 테일러. 한국 생활을 기록한 자서전 <호박 목걸이>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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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촬영된 딜쿠샤│서울시
집 자체로도 역사적 가치 지녀
집주인 사연으로 유명해졌지만 주택은 집 자체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딜쿠샤는 1920~1930년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 기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벽돌을 세워서 쌓는 ‘공동벽 쌓기’라는 독특한 조적 방식이 적용돼 한국 근대 건축사 적으로도 의미 있는 공간이다. 당시 서양식 2층 벽돌집은 경성 시내에서 매우 보기 드물었다. 딜쿠샤는 개항 이후 서양 물품들이 쏟아져 들어온 뒤 어떻게 우리 생활에 유입되고 절충돼서 생활양식이 됐는지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딜쿠샤 내부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에 역사·인문학적 배경이 담겨 있다.
사전 예약을 하고 부부가 살았던 집을 찾아갔다. 근대 경성에 살던 서양인 부부가 이 집에서 살았던 시대로 걸어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총 면적 623.78㎡ 규모로 조성된 딜쿠샤 전시관 내부는 거주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 활동과 테일러 가족이 한국에서 지낸 생활상도 전시돼 있다.
1층 내부 거실로 들어가니 당시 실내 사진 자료를 토대로 내부에 탁자와 시계, 벽난로, 은촛대, 꽃병, 거울 등을 그대로 배치해 놓았다. 이 가구와 공예품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만들어진 고가구를 구매해 재현했다. 구할 수 없는 일부 가구는 사진 모습 그대로 제작했다.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 연회를 여는 공간이었다. 그 기능에 맞게 중앙에는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재깍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크다고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에 기록된 괘종시계도 볼 수 있었다. 거실 벽면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설치돼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메리의 친정 가문 문장이, 벽난로 양쪽에는 조상들의 판화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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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딜쿠샤 1층 거실.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벽이 눈에 띈다.
전시물 하나하나 흥미와 감동
딜쿠샤의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날씨를 고려한 창문이다. 무덥고 습한 장마철에 대비해 베란다에 큰 창 세 개를 내고 벽난로 근처에 작은 창을 내어 바람이 잘 통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매서운 겨울 날씨를 대비해 1층 거실과 방마다 난로를 설치했다. 1~2층을 오가며 쓰던 이동식 난로도 보였다.
거실을 지나 2전시실로 이동했다. 딜쿠샤를 지었던 초창기를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들어온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자이자 테일러상회를 운영하던 경영인이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난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테일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1917년 인도에서 결혼했고 이후 한국에서 생활했다.
3전시실로 이동하니 한국 생활상도 볼 수 있었다. 부부는 한국 여러 곳을 여행했다. 남편, 아들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온 메리 테일러는 당시 보았던 금강산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하지만 한국에서 두 사람의 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적국 국민을 수용소에 구금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1941년 12월 구금됐다. 메리 테일러는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형무소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 거기에 줄지어 걷는 사람의 수와 우리 측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의 수와 일치했다.”
이어 2층 응접실을 관람했다. 집안일을 도와줬던 공 서방에 관한 사연과 에피소드 등 전시물 하나하나의 사연은 흥미롭고 감동적이었다. 영상실도 있어서 딜쿠샤와 테일러 부부, 그의 자손들이 딜쿠샤를 찾는 과정이 담긴 영상물도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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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2층 거실에서 테일러 부부는 대다수의 여가 시간을 보냈다.
반세기 넘게 방치되다 최근에 복원
이 집은 서양인 가족이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으로 조선을 떠난 뒤 방치돼 있었다.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세입자가 들고나면서 내부는 좀처럼 공개되지 않았고 원형은 대부분 훼손됐다. 2000년대 이후 뒤늦게 원래 주인인 미국인 가족의 거주 내력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딜쿠샤는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2018년 새롭게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전문가의 손길로 말끔하게 원형을 복원한 뒤 이제야 사람들을 향해 문을 연 것이다.
1~2층 모두 관람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고증·복원의 결실을 맺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근대사 연구자, 근대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 수많은 사람이 복원에 참여했다. 가구 등을 일일이 고증하고 국외에서 입수해 배치한 근대 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 최지혜 씨는 관련 책을 펴내 호평을 받았다. 테일러 부부가 남긴 흑백 실내 사진 6장을 토대로 복원 작업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시대성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 집이기에 흑백 사진을 기초로 물건을 하나하나 확대하고 역사나 연원을 밝히고 동시에 가장 유사한 물품을 사는 것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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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내부에 있는 우리나라 전통 가구 삼층장│서울시
유족 서울역사박물관에 유물 기증
손녀 제니퍼 테일러는 2월 26일 열린 개막식에서 “가족에게서 받은 많은 유물을 어떻게 기증할지 여러 번 문의했다. 유물을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쁘게 기증했다. 딜쿠샤는 조부모의 영면에 적당한 장소다. 이와 관련해 할머니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호박 목걸이>가 떠오른다”고 감회를 밝혔다. 이어 “메리는 아름다운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썼다.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 조부모의 물품을 소유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제 모든 유물이 딜쿠샤 안에 들어와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1942년 강제 추방됐지만 오래도록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테일러는 추방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아내 메리는 그 후 입국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유해를 안치했다. 조선 독립의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열정과 노고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딜쿠샤 곳곳에 남아 있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