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빚고 이를 보며 스스로 흡족해했다. 흙으로 빚었으나 그 안에 신의 생령을 불어넣었기에 신의 영혼을 닮게 된 인간. 바로 신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화포에 자신의 생령을 물들여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자화상을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서양미술사는 근대 자화상의 시조로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8~1528)를 꼽는다. 뒤러 이전의 화가치고 제대로 된 자화상을 남긴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왜일까? 자화상은 근대적인 자아의식이 표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근대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자화상도 일종의 초상화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는 고객이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그려달라고 주문해 제작된다. 고객이 남남인 화가에게 돈을 주며 자화상을 그려달라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 푼이 아쉬웠을 화가들은 팔리지도 않을 자화상을 그릴 여유가 없었다. 이것이 르네상스 이전까지 자화상이 잘 그려지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면 화가는 더 이상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예술가가 신적인 재능으로 충만한 이라는 것을 세상이,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과 돈이 인정하게 되면서 마침내 시장에서 화가들의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지위가 오른 화가들은 주문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화상이 초상화의 주요 장르 가운데 하나로 꽃피어나게 된 것이다.
자화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나다”를 외치게 된 화가들. 이는 근대에 들어 크게 강화된 개인의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대변하는 현상이었다. 적극적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들로부터 우리는 역사와 사회,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격렬히 싸우는 근대적인 영웅의 모습을 본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고유한 개성과 의지를 화포의 씨줄과 날줄에 물들이는 위대한 투사의 모습을 본다.

▶ 반 고흐,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1888, 캔버스에 유채, 51×45cm, 시카고 리 B. 컬렉션
빈센트 반 고흐(1853~90)는 이와 같은 ‘자기 투사’ 또는 ‘자기 구현’의 격렬함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마치 산고를 치르는 임산부와 같이 그는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그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 고흐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일차적인 이유는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서였다. 인물화 연습은 해야겠는데, 모델에게 줄 돈은 없고 자연스럽게 자화상을 그리게 되었다. 동기가 어찌 되었든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다른 모델을 그리는 것과 심리적인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화포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다른 모델을 그릴 때와는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너는 누구냐? 어디에서 왔느냐? 또 어디로 가느냐?”
어떤 화가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해 이런 질문을 노골적으로 쏟아 붓지 않는다. 화가에게 모델은 일차적으로 ‘그려지는 대상’으로 인지될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대면한 화가는 불현듯 “너는 누구냐?”라고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묻게 된다.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반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이 헤어나기 어려운 질문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마침내 귀를 자른 뒤 그 처절한 모습까지 캔버스에 담았던 반 고흐. 그 그림을 보노라면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당신들이 도대체 나의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하는 항의가 들려오는 듯하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평생 집요하게 던진 다른 유명한 자화상의 화가로는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1907~54)가 있다. 칼로 역시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 그림들에는 늘 남성과 여성, 서구 문명과 인디오 문명의 갈등이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다. 둘로 나뉜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갈등하는 자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칼로는 유럽인의 피와 인디오의 피를 함께 이어받았다. 전통사회의 문화에 익숙했으나 남편 리베라와 함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을 돕는 등 매우 활달한 진보적 투사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 남성 위주의 사회 현실에서 여성 예술가로서 자기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이런 경계선상의 상황은 칼로에게 평생토록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게 했다. 더욱이 여러 차례의 사고 경험으로 육체적인 장애를 갖게 된 칼로는 늘 예민하게 내면의 갈등에 반응했고 그것을 그대로 자화상에 담았다.

▶ 칼로, ‘상처 난 사슴’, 1946, 캔버스에 유채, 173.5×173cm,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
각각 서양식 드레스와 인디오 의상을 입은 두 여성의 이미지로 자신을 그린 ‘두 사람의 프리다’, 미국 산업문명의 힘과 사라져가는 멕시코의 전통을 대비해본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에 선 자화상’ 등은 예의 분열하는 자아를 잘 드러내 보이는 작품들이다. 그런가 하면 여러 개의 화살을 맞고 달려가는 사슴으로 자신을 묘사한 ‘상처 난 사슴’은 그런 분열과 갈등이 초래한 극한의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쨌든 이들 작품에서 엿보게 되는 모든 갈등과 고통은 그녀가 여성이어서 더욱 증폭된 면이 있다. 여성이었기에 그녀는 사회로부터 더욱 소외됐다. 그 한을 칼로는 여성인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 더욱 강렬하게 표출했다. 이는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존감의 발로였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