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몰러 그런 거. 우리 사는 거 그대로 보여주는 거제 뭐. 좋아. 다시 사는 기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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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숭오2리 입구에 위치한 팻말, 숭오2리 마을회관 벽면에 꾸며진 조형물 ⓒC영상미디어
지난 10월 21일 열린 2018 칠곡 인문학마을 축제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이종순 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종순 씨는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1리 토박이다. 이곳에서 보낸 세월만 50여 년. 칠곡군에 인문학마을이 결성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마을의 변화를 몸소 겪은 주민이다. 이 씨는 이날 무대에서 100년이 넘었다는 마을 빨래터 이야기를 들려줬다. 무대를 끝낸 그의 얼굴엔 완벽하게 해냈다는 안도감, 열렬한 환호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번졌다. 인문학마을의 흔한 풍경이다.
칠곡 인문학마을은 ‘마을’이라는 물리적인 공동체이면서 사람과 삶이 어우러지는 문화 공동체다. 칠곡군은 2004년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되면서 함께 배우며 즐겁게 사는 법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고민의 끝은 사람 중심의 마을, 더불어 삶의 가치를 전수하는 ‘인문학마을’로 귀결됐다. 2013년 10개 마을로 출발한 칠곡 인문학마을은 어느덧 29개 마을을 품고 있다.
이들 마을은 인문학으로 묶인 터전이라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모습이다. 곳곳에서 시를 쓰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는 마을, 한글을 읊는 마을, 공예를 하는 마을 등 마을마다 고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칠곡군이 지방 소도시가 겪는 고령화, 저성장의 파고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여기에 있다. 주민들이 주체가 돼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는 점이다. 정태원 칠곡 인문학마을협동조합 사무국장은 오랜 교류가 낳은 마을 간 끈끈함을 자랑했다.
“매년 두세 개씩 인문학마을이 늘고 있어요. 초기만 해도 50개 마을을 목표로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숫자보다 내실을 갖추자는 데 뜻을 모았죠. 소소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을마다 생기는 여러 일들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공유하고 해마다 10월엔 축제를 열고 결과물을 선보여요.”

▶ (왼쪽부터) 칠곡 인문학마을 축제에서 한 어르신이 어린이에게 칼국수 밀기를 가르쳐주고 있다. 어린이들이 마을 축제 체험 프로그램에 몰두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칠곡 인문학마을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전통 세대와 젊은 세대가 지혜를 나누고 그 안에서 사람도 마을도 성장이 끊이질 않는다. 같은 군 안에 전혀 다른 전통 마을과 아파트 마을이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북삼읍 현대아파트 마을 청소년들은 인근 전통 마을 어르신들에게 휴대전화 이용법을 알려주며,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북삼읍 어로1리에서는 마을 어르신들과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인문 텃밭’을 가꾼다. 아이들이 흙과 친해지길 바라는 어르신들의 작은 배려다.

▶ (왼쪽 위부터) ‘시를 먹고 자란 단감’ 마을인 숭오2리 주민들이 담벼락 앞에 서 있다. 김학술씨가 신문지로 엮어 만든 짚신을 들어 보이고 있다. 빨래터 합창단원들이 무대 소품을 든 채 미소짓고 있다. ⓒC영상미디어
숭오1리 마을회관에선 글 읽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든 전후 동네 어르신 20여 명이 한글을 배우는 소리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모여 배움을 시작한다. 글공부를 마무리하면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을 명물 ‘빨래터 합창단’이다. 과거 빨래터에서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하며 흥얼거리던 가락이 마을을 대표하는 합창곡이 됐다. 빨래터 합창단이 결성된 지 3년이 흘렀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지난 삶이 녹아든 노래에 극적인 요소까지 더하며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마을 축제 무대에 선 빨래터 합창단의 구성진 소리는 가슴을 울렸다. 무대 아래 한구석에서 율동을 지휘하던 정은경 씨는 뭉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인문학이 불어넣은 활력
“가족을 위해 자신은 늘 뒷전이었던 어머니들이 이젠 우리 마을의 중심이에요. 인문학이라고 별거 있나요. 이렇게 함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을 찾아가는 거죠.”
인문학마을 주민들에게 인문학의 학문적 정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인문학은 ‘같이 웃으며 사는 것’일 뿐. 그런 의미에서 전통 자원을 미래 세대에 전하는 것 또한 이곳의 인문학이다. 70년 넘게 보손리에서 살아온 김학술 씨가 주민들에게 신문지 재생공예 기술을 가르치는 이유다. 북삼읍 보손2리 사람들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새끼줄 꼬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낡은 것을 매만지며 숨은 가치를 찾아 엮는 중이다.
숭오2리에는 ‘시를 먹고 자란 단감’ 마을이 있다. 하루 세 번 스피커를 타고 주민들의 시 낭송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오롯이 이 마을 특산물 단감을 위한 작업이다. 벽면에도 시와 그림이 한 가득이다. 여기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이 직접 쓴 시다. ‘힘들게 일하다 학교 가는 날이면/ 친구들도 만나고 예쁜 선생님도 만나서 요가도 하고(…)’라는 시구가 유독 눈에 띈다. 밭에 나가랴 마을회관에 가랴 주민들의 바쁜 하루가 선연히 그려진다.
성인문해교육 강사 김점례 씨는 인문학마을이 되면서 숭오2리 마을에 활력이 생겼다고 했다. 이전에는 “배워서 뭐하느냐”고 했던 어르신들이 이젠 “배우면 되지”라고 한단다. 덕분에 젊은 층과 노년 층 사고의 격차는 줄었고 소통의 시간은 늘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숭오3리 주민 고경자 씨도 인문학마을이 되기 전과 후 마을의 모습엔 분명한 변화가 생겼다고 기억했다. 그는 “밖에 나가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는데 인문학마을이 되자 집안에만 있던 사람들도 나와서 어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숭오3리는 여느 마을보다 자연이 깃든 인문학마을이다. 주민들은 날이 좋으면 소나무 숲으로 향한다. 저마다 챙겨온 간식을 나누며 자연과 사람을 만끽하는 ‘마을 소풍’은 숭오3리의 인문학이다. 이따금 마을회관에서 향기가 퍼져 나오는데, 이것은 주민들이 딴 꽃으로 만든 꽃차 내음이다.
천왕제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마을도 있다. 영오1리 주민들은 1년간 마을이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을 모아 천왕에게 제를 올린다. 이를 통해 마을의 깊이를 더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영오1리의 인문학인 셈이다. 이처럼 다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마을 살이, 칠곡 인문학마을이 말하는 인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