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1890년 유화 작품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덧칠한 고흐의 이글거리는 붓 터치가 특징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굵은 가지에 피어 있는 흰 아몬드 꽃을 그렸다. 고흐는 1890년 2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조카 빈센트가 태어나자 막 피어나기 시작한 흰 아몬드 꽃을 그려 선물하려 했다. 그러나 그해 7월 갑자기 생을 마감하면서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최근 출간된 갤러리북 1권 <빈센트 반 고흐>에 수록된 이 그림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두면 마치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 걸린 원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정교하다. 고흐의 거칠거칠 두툼한 유화 물감의 마티에르(질감)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원화의 강렬한 느낌을 담아낼 수 있게 엠보싱지(올록볼록한 느낌이 나는 종이)를 사용해 그 느낌을 배가시켰기 때문이다.

▶ 명화와 똑같은 명화 시리즈 ‘갤러리북’을 만드는 유화 유화컴퍼니 대표. 그의 손에 들려있는 건 그림이나 사진을 확대해 보는 루페다. 망점을 확인하는 등 인쇄가 제대로 됐는지 체크하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다. ⓒC영상미디어
유화(45) 유화컴퍼니 대표는 “첫 권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고흐의 대표작 23점을 책 속의 그림으로 되살려냈다”며 “일반 대중도 그림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 산책>, <루브르 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등을 낸 김영숙 작가가 해설을 곁들였다”고 말했다.
100권 시리즈 출간을 목표로 이제 막 1권을 낸 ‘갤러리북’의 모토는 ‘명화의 색감과 붓 터치, 물감 번짐까지 원화를 100% 구현한 책’이다. ‘갤러리북’도 ‘갤러리(화랑)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책’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라고.
반 고흐 미술관 측에서도 극찬
유 대표는 오래전 반 고흐 전시회를 다녀왔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교과서, 도록, 시중의 책에서 보던 그림과 전시회에서 본 실제 그림은 완전히 달랐다”며 “이제껏 보던 그림에 느낀 실망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고 했다. 이어 “고흐의 ‘자화상’을 미술 교과서에서 보는 것은 자화상을 형태로만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전시장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원작의 아우라를 경험하고 나면, 지금까지 본 흐릿한 그림에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올봄에 고흐 그림을 담은 1권이 나오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우연히 출간일을 3월 30일로 했는데, 그날은 고흐의 탄생일이다. 그는 원작을 충실히 책에 담아내기 위해 기존 미술 도판이나 화보의 출판 방식인 ‘오프셋 인쇄’를 탈피했다. 대신 종이 질감부터 잉크, 분판 기술 등의 새로운 시도를 했다.
유 대표는 2003년부터 고흐 작품을 소장한 네덜란드 미술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원작을 책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연구해왔다. 틈나는 대로 외국 미술관과 갤러리를 찾아가 원화들을 꼼꼼히 관찰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은 물론 크뢸러 뮐러 미술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등을 수차례 방문했다.
미술관 특유의 조명 영향도 계산해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원작 색을 분석해 노트북에 담아왔다. 유 대표는 찍고 또 찍어내기를 반복하면서 관련 데이터를 쌓았다. 일감이 많지 않을 때는 캘린더나 사진집 제작 등 가욋일을 해가면서 돈을 모아 실험에 매달리기도 했다. 유 대표는 인쇄 과정에서 원작의 색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이, 잉크, 망점, 분판 등 전반에 걸쳐 기존과 다른 복제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명화의 붓 터치와 물감의 번짐까지 보이는 갤러리북은 그 긴 노력 덕분에 탄생했다. 고흐의 고향인 네덜란드 미술관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줬다. 그런 기술을 먼저 개발한 누군가가 있다면 네덜란드부터 찾아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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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고흐미술관에서 작업 중인 유화 대표. 원화와 노트북 화면 속 원화 이미지 파일이 똑같아 보일 때까지 보정한다. ⓒ유화컴퍼니
유 대표는 “지난해 6월 포트폴리오를 갖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찾아갔는데, 책을 본 사람마다 인쇄 상태와 책의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며 “크뢸러 뮐러 미술관 큐레이터 할머니는 두 시간 내내 대화를 나누면서 책을 아기처럼, 보물처럼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흐뭇해했다. 이 일로 유 대표는 이 기술은 지구상에서 자신만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유 대표는 문화·예술계에서는 꽤나 알려진 ‘인쇄 장인’이다. 프린트 디렉터, 즉 인쇄 감독이라는 이름도 유 대표가 만들었다. 오프셋 인쇄기도, 자신만의 인쇄소도 아직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인쇄물을 내어놓으려는 집념 하나로 고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유 대표는 “감동을 주는 인쇄를 하고 싶었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만 했다”면서 “15년을 버틴 이유는 그것 하나밖에 없다”고 밝혔다. 유 대표에게 인쇄는 영화 한 편 찍는 일과 같다. 그는 책의 질을 위해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공정을 지휘한다. 질을 높이려면 책 만드는 모든 과정을 알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유 대표의 본업은 북디자이너로, 사진집 디자이너로 더 알려졌다. 그가 펴낸 사진집들은 루페(소형 확대경)로 보아도 망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계 정상급 흑백 덴시티(농도)를 자랑한다.
미술이 좋아서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제도권 교육이 맞지 않아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대학을 그만두고는 6년 가까이 놀았다. 26세 되던 해 북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유 대표는 “어머니가 파주에서 칼국수 식당을 했는데, 벽에 걸어둔 내 그림을 보고 디자인 회사 사장님이 일을 배워보라고 했다”며 “주말도 없이 회사에서 먹고 자며 4년을 책에 푹 빠져 살았다”고 했다. 그때 그에게 인쇄 기술의 벽이 나타났다. 2002년 인쇄 선진국인 독일로 떠나 45일간 유명하다는 독일 인쇄소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는 실망했다. 독일도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이다.
2010년 10월 그는 ‘인쇄지만 그림 같은 인쇄’를 목표로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실크스크린이나 에폭시 가공 등 고가의 판화 기법을 응용해 그림의 질감이나 깊이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순수하게 일반 인쇄로 판화 같은 질감을 표현하는 고도의 작업을 추구했다. 인쇄기를 빌려 실험 한 번 하는 데 400만~500만 원이 들었다. 인쇄용지에 최적화된 인쇄 방법을 찾느라 6개월 만에 1억 원을 쓰고도 소득이 없자, 가족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곧 한계에 다다랐다.
“비교 대상은 원화뿐”
부업으로 전단지를 찍어가며 15년간 10억 원쯤 썼다. 그의 노력의 결과는 12컬러 오프셋 인쇄기술, 4컬러 흑백 인쇄기술 개발로 나타났고, 국내 최초로 44종의 인쇄용지 특성 테스트를 완료했다. 2004년에는 싱가포르 프린팅 어워드 아트프린팅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화 복제기술은 아트포스터, 판화포스터, 캔버스에 직접 프린트한 후 진짜 물감을 덧칠하는 방식 등 다양하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가격이 껑충 뛴다. 복제된 작품이 원화와 가까울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유 대표가 개발한 기술은 간단히 말하면, 안료를 특수한 방식으로 쓰고 종이 단면에 미세한 층을 만든다. 그러면 눈이 그 층과 색을 입체로 착각한다. 인쇄 원판은 미술관의 원화와 노트북 모니터에 띄운 원화 이미지 파일을 눈으로 대조해가며 만든다. 원화와 파일이 똑같아 보일 때까지 보정을 거듭한다. 미술관 조명에 따라 원화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반영한다. 수개월씩 걸리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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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갤러리북 1권 <빈센트 반 고흐> 표지 2 고흐가 1888년 프랑스 아를의 밤하늘을 그린 ‘론 강의 별빛’ ⓒ유화컴퍼니
갤러리북 1권 <빈센트 반 고흐>(102쪽)는 가격이 2만 8000원이다. 여느 미술관 도록보다 싸다. 장당 만 원이 훌쩍 넘는 아트포스터 품질과 비교하면 갤러리북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는 더 뛰어나다. 책은 180도로 펼쳐지면서 동시에 한 장씩 깨끗하게 뜯어낼 수 있도록 제본했다. 그림을 그대로 뜯어 액자에 넣으면 누구나 고흐 명화를 집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비싼 인화지, 복잡한 공정이 필요 없어서 그 가격이 가능한 거죠. A4용지 기준 80원짜리 종이를 씁니다. 0.2초면 그림 한 장을 찍는데,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15년이나 걸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미술책과는 비교도 하고 싶지 않고, 오직 비교 대상은 원화뿐입니다.”
유 대표가 활자도 사진도 아닌, 그림 인쇄에 집착하는 최종 목표는 소박하다. 갤러리북처럼 인쇄된 동화책을 만드는 것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이 우리가 만든 갤러리북을 보고, 우리가 만든 동화책을 보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어린이들이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작가인 에릭 칼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즐기게 하고 싶은 거죠. 고흐가 ‘나의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아이들이 동화책을 펼쳤을 때 ‘아’ 하는 탄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 시작이 갤러리북이고 최종 목표는 동화책입니다.”
유 대표는 “올 연말 고흐 2편을 추가로 발행하기 위해 고흐의 ‘아를의 붉은 포도밭’과 ‘별이 빛나는 밤에’ 두 작품을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과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서 작업하려고 한다”며“다만 비용 문제 때문에 연구 과제의 70% 정도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내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요하네스 베르메르 편도 기획 중”이라며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우유 따르는 여인’,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쓴 파랑을 세계 최초로 인쇄로 구현하려 한다”고 했다.
넉 달간 팔린 갤러리북은 3000여 권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엄청난 적자인 셈이다. 유화컴퍼니는 지난 6월 ‘갤러리북’ 제작 공로로 중소벤처기업부 주관의 ‘소공인 제품 판매 촉진지원사업’에 사업자로 선정됐다. 국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4500만 원(984명 참여, 목표액의 455% 달성)을 모금하는 등 갤러리북의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소공인 제품 판매 촉진지원사업을 통해 해외 전시회에 참가, 갤러리북 성공 열풍을 이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갤리리북은 정부 지원을 받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나가 전 세계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유 대표는 “한국 시장만 생각했다면 미친 짓이었을 것”이라며 “갤러리북을 일본 시장을 비롯해 세계로 내보낼 것”이라고 했다.
유 대표는 “갤러리북 100권이 완간된다면 전 세계 작가의 원화는 색이 바래겠지만, 갤러리북의 ‘원화’는 영원히 보존되는 셈”이라고 했다.
오동룡│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