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이 기록의 수단이었다. 그림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과거를 추적하고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비단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기록된 건 아니다. 그림의 소재는 광활한 풍경이 되기도, 작은 생물이 되기도 했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사진이 있었다고 해도 사진으로 미처 담아낼 수 없는 구조를 그려냈다. 이처럼 식물의 기록을 목적으로 관찰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을 가리켜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Botanical Illustration)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식물세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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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래꼬리풀 ⓒC영상미디어 석장포 ⓒC영상미디어 홍도서덜취 ⓒ국립수목원
국립수목원이 식물세밀화를 정의한 바에 따르면 “식물 표본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식물체가 가지고 있던 원래 형태와 색채를 유지하지 못해 그 정보를 알 수 없어, 이를 기록해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는 사람의 감성이 식물세밀화에 더해지면 식물의 아름다움이 색다른 느낌으로 돋보이는 예술작품이 되는데 이를 두고 보태니컬 아트(Botanical Art)라고 부른다. 일각에서는 식물 전문가와 보태니컬 아트 작가를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조금 다르다. 공통적으로 식물을 소재로 하되, 식물 전문가는 정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표현하는 반면 보태니컬 아트 작가는 개인의 미적 취향을 접목한다.
보태니컬 아트의 연원은 유럽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귀족들에게 넓은 정원과 그 안의 식물은 권력의 상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 허브를 약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들은 여러 이유로 식물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길 원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그림이었다. 그때부터 따진다면 보태니컬 아트의 역사는 꽤 긴 시간이지만 국내에 알려진 지는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협회나 조합 등 국내 보태니컬 아트 관련 공식 조직이 몇 곳 되지 않지만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KBAC)은 그중 하나다.
“어떤 플로리스트가 일본에 가서 보태니컬 아트를 경험하고 국내 교육 과정 중 하나로 도입한 게 시작점이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이미 일본에서는 보태니컬 아트가 취미 미술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자랑하거든요. 반면 국내 인지도는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지만 높은 편이라고 할 순 없어요. 그래서 KBAC는 보태니컬 아트 국내 보급화를 목표로 2015년 9월 탄생한 법인입니다.”
그리기 앞서 식물 조사 과정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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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한국보태니컬아트협동조합 사무실에 전시된 작품들 2 신소영 이사장이 보태니컬아트 작품을 든채 미소짓고 있다. ⓒC영상미디어
신소영 KBAC 이사장에 따르면 보태니컬 아트를 하는 사람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KBAC의 모태이자 신 이사장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 수는 최근 2000여 명을 넘어섰다. 하루 가입자가 열명도 채 되지 않았던 때와 비교하면 주목할 만한 성장세다.
보태니컬 아트는 단순히 식물을 관찰한 그대로 그리는 것과 다르다. 언제, 어떤 관점에서 관찰했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과물이 확연히 달라진다. 이를테면 같은 장미 한 송이를 그리더라도 누군가는 잎맥에 초점을 둔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장미의 생애 전주기를 담아낸다. 무엇보다 그리는 사람의 성향이 투영되는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미술 전공 여부와 관계없이 배우고 노력하면 누구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예술 분야예요. 일반 취미 활동부터 순수 과학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게 방증이죠. 전문성보다 쏟는 시간과 열정만큼 그 작품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분야입니다.”
보태니컬 아트는 그리기 작업에 앞서 식물 조사 과정을 필요로 한다. 단순 취미 수준으로 작업하거나 식물의 일부를 표현한다면 생략해도 되는 단계이지만, 보다 세밀하게 기록하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 우선 대상 식물을 정하고 기본 정보를 인지한 다음, 기간을 정해 실제 관찰에 나선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식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서도 모습이 많이 달라지는 탓에 발생할 수 있는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변형된 식물들도 있어요. 이를테면 7월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 시기에 맞춰 채집을 나서면 이미 시들어 없어진 경우가 있었어요. 어쩌면 생태계 변화로 멸종하는 식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런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죠.”
신 이사장은 보태니컬 아트의 매력으로 ‘자연환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꼽았다. 식물을 꾸준히 관찰하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그것이 애정으로 이어져서다. 자연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DMZ 일원 식물을 보태니컬 아트로 자료화하는 작업이 가능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그 연장선이다.
보태니컬 아트는 식물 정보 기록 외에 새로운 파생 직업으로서 가치도 지닌다. 접목할 수 있는 분야도 다양하다. 모바일 액세서리, 에코백, 화장품 등 무수히 많다. 특히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 경력단절여성들이 전문 작가 또는 강의자로 활동할 수 있어서다. 다만 정부와 지자체의 활발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게 신 이사장의 이야기다.
“국내 시장은 태동기를 조금 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성숙기에 제대로 들어서기 위해선 정부, 지자체, 대기업 등의 관심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식물 학습이 필요한데 자료 수집이 충분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지자체마다 보유하고 있는 자료 체계와 비할 수가 없죠. 조합의 인적네트워크와 지자체가 힘을 합하면 국내 식물을 알리고 보전하는 작업도 보다 체계를 갖출 수 있을 겁니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