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책가방 한편에 파우치 하나를 소중히 가지고 다녔다. 선생님께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면서도 그 알록달록하고 향긋한 화장품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미술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늘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엔가 그림을 그리다가 가방에 있던 화장품 생각이 났다. 아크릴 물감으로는 잘 되지 않던 작업이 비비크림을 바르자 쓱쓱 진도가 나갔다.
“고등학교 때 비비크림으로 그림을 수정했던 게 번뜩 생각났어요. 역시 좋아하는 걸로 해야 행복하게 작업을 할 수 있나 봐요.”
그때의 기억은 한동안 잊고 지냈다. 아동미술학과에 입학했고, 졸업할 즈음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그림 말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다 다시, 화장품 생각이 났다. 좋아하는 재료로 그리면 좋아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내친김에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기로 했다. 그즈음 즐겨 듣던 뮤지션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아이섀도를 묻히자 생기 있는 얼굴이 나왔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과 화장품으로 바른 그림은 다른 차원의 작품이었다. 자신의 얼굴에 셀럽의 얼굴을 담는 뷰티 유튜버처럼, 화폭에 담은 셀럽의 얼굴을 SNS에 올렸다. 반응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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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이클링 화가로 불리는 김미승 작가는 “좋아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누구나 화장대를 열어보면 비싸지만 쓰지 않는 화장품과 아끼다 쓸 수 없는 화장품이 몇 개쯤은 있다. 어떤 제품은 너무 안 어울려서 쓸 수 없고, 어떤 제품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서 쓸 수 없다. 한때는 아름다움을 위해 쓰였던 영롱한 이들이 이제는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김 작가는 무엇보다 그가 아끼는 화장품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는 이유로 버려지지 않고, 또 한 번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 쓰인다는 게 좋았다. 재료가 바뀌니 작품의 영역도 확장됐다. 물감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는 살의 결이나 펄 감 등이 화장품을 사용하자 다채로워졌다.
좋아하는 재료로,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에는 셀럽의 얼굴을 그리는 걸로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인상 깊었던 이미지들이 남았어요. 그 이미지를 어떻게 화폭에 구현해낼지를 고민하게 되었고요.”
영화를 볼 때나 음악을 들을 때나, 살면서 인상 깊은 장면을 만날 때마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화폭이 펼쳐진다. 화장품의 뚜껑을 열고 브러시로 쓱쓱 그려낼 순간들이다.
“생각보다 작업은 오래 걸려요. 화장을 할 때도 그렇잖아요. 마음에 드는 순간까지 고치고 또 고치잖아요. 화장품 그림도 그래요. 물끄러미 보고 있다 보면 좀 더 예쁘게 수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여요. 그렇게 한 작품을 오랫동안 보고 있어요. 한 번에 한 작품씩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해서 더 작업이 더딜 수도 있고요.”
물감이 아니라 화장품이라 더 입체적인 그림이 가능하다. 어디에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굴곡이 생기기도 한다. 수분이 많은 제형과 건조한 제형에 따라 만들어지는 질감도 다르다. 피부색은 비비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림보다 더 실제 같은 터치가 가능하다.
“화장품은 사람이 쓰는 거니까 인물화를 그리는 데 더 적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영역이 넓어져요. 예를 들어서 저는 꽃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화장품을 이용하면 기존에 표현할 수 없었던 느낌이 살아나거든요. 특히 화장품의 화려한 느낌은 꽃의 화사함에 잘 어울려요. 아이섀도나 스틱을 이용하면 파스텔처럼 꽃잎의 색감이 부드럽게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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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화장품으로 그린 반 고흐, CL, 아이유 ⓒC영상미디어
리사이클링 아트, 버려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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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승 작가의 작품은 인물 그림에서 꽃 그림으로 확장된다. ⓒ스튜디오 UND
인물에서 꽃으로 옮겨갔던 관심은 이제 동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버려지는 동물들이다. 그가 처음 버려지는 화장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버려지는 동물의 그림으로 이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화장품이라는 재료도 만약 그냥 버려졌다면 그 가치가 사라졌을 거예요. 하지만 그림으로 살아나면서 다시 아름다운 작품이 됐죠. 버려진 화장품으로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그린다면 더 뜻깊을 거라 생각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이들의 가치를 보여주는 데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재료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도구로 ‘리사이클링 아트’라는 분야를 개척한 김미승 작가는 이제 리사이클링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주는 피사체를 찾아가고 있다. 스스로 성장하는 단계다. 더구나 그의 그림을 응원해주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이들은 말로만 응원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직접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화장품을 보내준다. 아끼지만 사용할 수 없던 화장품이 ‘예술’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보낸다.
“처음엔 그림만 그렸는데, 제 그림으로 이렇게 많은 분들의 후원과 응원을 받다 보니 이제 어떻게 보답할지에 대한 생각도 많아져요. 딱 봐도 소중히 여기던 제품을 보내주는 경우도 많거든요. 제가 화장품을 아껴봐서 아는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아요. 그래서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제일 커요.”
올해 스물다섯, 졸업 후 어떤 길을 갈지 막막하던 때도 있었다. 리사이클링 아트는 김 작가가 ‘전업 작가’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는 계기가 됐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난 5월에는 ‘YCK 2018’, ‘Young Creative Korea’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다. 영상과 사진, 건축, 영화, 예술, 패션 등이 모인 자리에 김미승 작가의 작품도 초대됐다. 매체를 통해 그의 그림이 알려지면서 ‘리사이클링 아트’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모양새다.
“책임감도 느껴져요. 이제 화장품 가게를 가면, ‘어떻게 하면 예쁘게 화장할까’가 아니라 ‘어떤 재료를 쓰면 예쁘게 그려질까’를 고민하는 저를 봐요. 중학교 때부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화장하는 걸 좋아했는데, 이제 그 애착이 그림으로 옮겨간 거죠. 그림에서 느끼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으니까, 외모나 화장처럼 그전에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좀 가벼워진 느낌이기도 해요.”
리사이클링 아트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그의 작업도 쉼 없이 진행될 것이다. 영감은 도처에 있고, 그의 작업실에는 오늘도 새롭게 재탄생되길 바라는 화장품들이 가득하다. 김미승 작가는 이름에 ‘아름다울 미(美)’와 ‘오를 승(昇)’ 자를 쓴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퍽 그와 어울리는 이름이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