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한 뼘 없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의 어느 날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한편에 모래언덕이 살짝 솟아 있다. 그 위로 얇은 나무젓가락을 든 채 무언가 끄적이는 한 남자가 보인다. 그는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고 있다. 무더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작업에 한창인 그는 모래조각가 김길만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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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평통보를 본떠 모래조각한 작품 2 가시고기를 형상화한 모래조각으로 김 씨가 애착을 갖는 작품 중 하나다. ⓒ김길만
김길만 씨는 주말마다 해운대해수욕장을 찾는다. 거주지인 경남 양산에서부터 이곳까지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다. 모래조각을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가깝지 않은 거리를 오고 간 지 어느새 30년이다. 여느 때와 같이 이날도 이른 아침부터 모래조각에 여념이 없었다.
“주말이면 여기 백사장은 제게 화실이고 작업장이자 캔버스가 돼요. 오전 7시부터 조각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더 덥네요. 그래도 날씨랑 오늘 작품명 ‘여름 여인’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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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만 씨가 작업도구인 나무젓가락을 든 채 미소 짓고 있다. ⓒC영상미디어
오뚝한 콧날과 머릿결, 머리카락 위로 놓인 꽃잎 주름 등 그의 정교한 표현 실력만 보면 전문 조각가 못지않다. 김 씨는 단 한 번도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다. 독학한 실력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매일 작업할 수도 없다. 평일에는 생업 현장에 있어야 해서 주말에 작업하는 게 전부다.
그는 제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이지만 어릴 적 꿈은 미술가였다. 어려운 형편 탓에 포기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건 1987년부터다. 친구와 해운대 바닷가를 걷던 중 우연히 모래를 만졌는데 이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촉이었다. 거친 것 같으면서도 보드라운 느낌이 쉽게 잊히질 않았다. 장난삼아 모래로 빚은 인어공주 형상은 그렇게 모래조각 활동의 발단이 됐다.
“제가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조각에도 소질이 있더라고요(웃음). 그림이든 조각이든 열정만 있다면 못해낼 것이 없겠구나 싶었어요. 이왕 도전하는 거 남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분야를 해보자 했고 그게 모래조각이에요.”
초기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 1000여 개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건 15개에 불과하다고. 당시에 잘됐다고 생각한 작품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곤 한다. 대신 매번 작품 속 문제점이나 실수를 짚어내며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기리는 수단이 될 수도
김길만 씨가 작업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모래와 물, 나무젓가락뿐이다. 대다수 모래조각가들이 들고 다니는 미장 칼이 그에겐 나무젓가락이다. 보다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눈앞에 뒹구는 쓰레기 하나를 발견했다. 지나가던 아이가 다 먹고 버린 핫도그 막대기였다. 미장 칼은 직선을 그리는 데 유용하다면 나무젓가락은 곡선 처리를 하는 데 매우 탁월했다. 그때부터 나무젓가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만의 도구가 됐다.
“모래조각이 그래요. 재료비가 거의 안 드는 것은 당연하고 매번 표현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물론 하루 중 반나절 이상을 혼자 작업하는 만큼 고독한 일이기도 해요. 때로는 물새 소리, 파도 소리가 벗이 돼줘요. 휴가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려 자연의 소리가 잘 안 들리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쉼 없이 모래를 주무르고 조각하던 그가 갑자기 양동이를 들고 바다로 향했다. 모래조각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모래가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면 벌 성분이 짙어야 하는데 바닷물이 그 부분을 돕는다. 모래와 바닷물을 1 대 1 비율로 섞어 질펀하게 만든 뒤 두드리면 조각판이 되는 셈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물이 금방 마르지만 바닷물은 소금기가 있는 덕분에 그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 김 씨가 작업 시작에 앞서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리 잡기가 쉽지는 않다. 김 씨에 따르면 과거 백사장에는 불법 상인들이 밀집해 자리다툼이 빈번했다. 하루는 장사가 방해된다며 인근 상인이 그의 소지품을 몽땅 숨긴 적이 있다. ‘조각 활동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맨발로 귀가하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날 이후로 그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백사장에 나가 연습했다.
“세월이 흐르니까 이곳 풍경도 많이 바뀌더라고요. 단속이 강화되면서 불법 상인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스마트폰이 생기자 사진사도 없어졌어요. 반대로 저는 시대가 변하면서 조명받게 된 것 같아요. 관광객들이 제 작품을 촬영하고 온라인에 올리면서 더 알려졌으니까요.”
이날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그의 작품 앞에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국내 관광객을 비롯해 외국인들도 모래조각에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 김 씨는 “영어를 잘 모르지만 뷰티풀이라는 소리가 들린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작업은 사시사철 이뤄진다. 각 계절마다 작품과 어우러질 수 있는 풍경이 달라서다. 그중에서도 겨울에 하는 작업을 가장 좋아한다. 핫 팩을 쥐고 조각해야 할 정도로 추운 날도 있지만 겨울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알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모래조각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는 영감이 떠오를 때면 곧장 스케치북에 그려뒀다가 모래 위에 새긴다. 때로는 누군가를 기리기도 한다. 최근 열렸던 2018 해운대 모래축제에서 고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조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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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씨는 2018 해운대 모래축제에서 고 손기정 마라톤 선수를 기린 모래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김길만
“축제 주제가 ‘영웅’이었어요.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에게 모래로나마 태극기를 달아주고 싶었어요. 또 손 선수를 알지 못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그를 알리고 싶기도 했고요. 기회가 된다면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도 작품화해볼까 해요.”
김 씨의 작품 활동이 박수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돈벌이가 안 될뿐더러 보존할 수도 없는 모래조각의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따른다. 그러나 그의 뜻은 분명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그는 작품이 완성된 그 찰나의 희열을 포기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저도 주말에 휴식도 취해봤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아마 제 인생의 색깔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백사장에서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저만의 작품을 완성하는 게 제겐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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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외 관광객들이 모래조각 작품에 호응하고 있다.
2 나무젓가락을 활용해 섬세한 곡선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뉴스프레스
3 2000년 미국 지역 매체에 게재된 김 씨의 작품 ⓒ김길만
국내 모래조각 시장 커졌으면
그는 퇴직 이후에는 조각에만 집중하려 한다. 우선 모래조각품을 감상하면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모래조각 테마파크’를 조성할 계획이다. 그는 테마파크 안에서 모래조각 체험교실을 운영하면서 국내 모래조각 시장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제가 알기로 모래조각을 직업으로 하시는 분은 국내에 두 분 정도예요. 외국에 비하면 국내 시장이 너무 좁거든요. 저는 취미생활로 하고 있다지만 업으로 삼은 분들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더욱 클 겁니다.”
더불어 모래조각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모래조각은 반드시 해변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학벌을 요구하지도 않죠. 오직 모래와 열정, 뜻이 있다면 가능한 이 예술이 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이른 오전부터 시작된 이날의 작업은 오후 3시가 돼서야 마무리됐다. 김길만 씨는 장장 8시간 동안 더위를 견뎌내며 만든 작품을 그대로 두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씨는 “자연에서 온 것이니 자연에 두고 와야죠”라며 “바람이 조금씩 가져갈 거예요”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모래의 의미를 물었다.
“제겐 장난감 같은 존재죠.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고요.”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