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랭크 코퍼레이션의 남대광 대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여행길에서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냈다. ‘블랭커에게 쓰는 편지 남대광 드림’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타지에서 좋은 풍경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에게는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동료들이었다. 그는 미국의 에어비앤비(Airbnb)에 갔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음에 새겼다.
‘자율적 업무 환경에서 나오는 당신의 역량을 믿고, 당신의 선함을 신뢰하며, 당신의 판단과 결정을 통해 회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직원 마음을 채워 고객의 필요 채운다
이는 블랭크 코퍼레이션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메일을 보면 ‘블랭크에 없는 것’과 ‘블랭크에 있는 것’이 정리돼 있다. 블랭크에 없는 것은 팀, 사수, 예산 그리고 룰 등이다. 팀은 다른 팀과의 배타적인 관계와 불필요한 경쟁을 만든다. 그는 차라리 회사를 ‘팀 블랭크’라 부른다. 모두가 한 팀이다. 블랭크 코퍼레이션에 신입으로 들어가더라도 사수는 만날 수 없다. 모두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일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동료’는 도처에 있다. 사내에서 이들은 서로를 ‘프로(pro)’라고 부른다. 대표도 마찬가지다. 예산과 룰이 없는 건 같은 이유에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1년 단위의 예산이나 룰은 의미가 없다. 반면‘블랭크에 있는 것’이 있다. 상식 그리고 논리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상식 그리고 서로 질문하고 답을 얻는 일이 자연스러운 논리적인 소통 구조다. 이때 ‘좋게 좋게’나 ‘누가 시켜서’라는 건 통하지 않는다. 제안의 이유와 강점 그리고 우선순위에 따라 예상되는 변수를 제거해가야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한다면 모든 아이디어는 현실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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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실에서 아이디어를 나누는 임경호 커뮤니케이션 프로(가운데)와 직원들 ⓒC영상미디어
‘블랭크 코퍼레이션’은 미디어 커머스 기업이다. 이들은 스스로 ‘디지털 방문 판매’ 기업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방판을 하는 제품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는 제품이다.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 욕구지만, 밤이면 잠 못 이루는 이가 생각보다 많다. 이들은 ‘마약베개’를 개발했다. 달걀을 놓고 밟아도 될 정도로 푹신하고, 베갯속을 함께 빨아도 되는 청결한 베개다. 이 제품에 소비자들이 열렬히 반응했다. 이들은 먼저 마약베개를 소개하는 후기 영상을 만들었고, 영상을 본 이들의 마음을 열었다. ‘당신의 고통을 우리가 알고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줄일 방법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유쾌하고 발랄하게 풀었다. 이후 발의 각질을 제거해주는 ‘악어발팩’도 대표 히트 상품이 됐다. 갑옷처럼 굳은 각질이 우수수 떨어지는 영상이 주효했고 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마약베개’와 ‘악어발팩’은 2018년 상반기 누적 판매량이 각각 80만 개, 141만 개를 기록했다.
“저희 모토는 ‘Lifestyle needs solution’이에요. 생활 속에는 결핍이나 고통이 있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죠.”
임경호 커뮤니케이션 프로의 말이다. 회사 이름인 ‘블랭크(blank)’도 거기에서 비롯됐다. 삶의 빈 공간을 찾는 일, 그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이 이들의 고민이다. 그 고민은 고객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블랭커의 ‘블랭크’를 채우는 데에도 미친다. 사원들이 겪는 생의 결핍을 회사에서 해결해주면, 업무에 더욱 몰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블랭크 코퍼레이션은 대표만 여행을 다니지 않는다. 직원들도 1년에 1회 해외여행 지원을 받는다. 회당 300만 원의 비용이 책정돼 있다. 여행을 통해 얻는 힐링과 영감이 다시 회사 안으로 들어와 선순환을 일으키리라는 믿음이다.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평균 연령은 젊다. 남대광 대표는 1985년생으로 서른넷이다. 그를 기준으로 위아래로 고르게 분포돼 있는데, 평균을 내보면 28.5세 정도 된다. 이들 세대의 대표적인 결핍은 ‘주거’다. 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는 상시적인 불안을 만든다. 블랭크 코퍼레이션에서는 직원에게 전세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준다. 또 월급과 별도로 매월 200만 원의 적금을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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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직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내 편의점
2 집중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포커스룸 ⓒ블랭크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고, 연차를 낼 때는 이유가 필요 없다. 사내에는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무료 편의점이 있고, 쉴 수 있는 릴랙스 룸과 집중할 수 있는 포커스 룸도 마련돼 있다.
“매주 전 직원이 모여서 타운홀 미팅을 엽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죠. 회사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거나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대표는 그 자리를 통해 블랭크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고요.”
‘회사의 돈은 회사의 성장에 쓰여야 한다’는 게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방향이고, ‘직원의 성장이 곧 회사의 성장’이라는 게 복지의 방향이다. 이들은 유형의 재산보다 한 사람의 직원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자금을 투자한다.
호날두처럼 일하기
남대광 대표가 제시하는 모델은 ‘유벤투스의 호날두’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본인의 몸값과 가치를 높이지만, 소속 구단과 에이전시의 가치를 함께 올리는” 선수이길 바란다. 그러려면 저마다 자신의 일에 몰입해야 한다. 그 몰입이 모르고 지나쳤던 고통의 빈 공간을 찾아내고, 그 공간을 해결할 방안도 모색한다.
“모든 소통은 사람과 사람, 생각 대 생각으로 이루어져요. 논리적인 토론을 어렵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죠.”
이를 위해서 아이디어와 데이터는 대부분 공유한다.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공개할수록 투명해지고 공정해진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영감을 주는 아이템이 생기면 동료들과 공유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영상을 보다가 눈에 띄었던 부분이나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부분도 공유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인풋(In-put)이 되어주는 거죠.”
자유롭지만 논리적인, 창의적이지만 상식적인 분위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면접 후기를 보면 논리성과 창의성을 함께 묻는 질문이 많다. 예를 들어 ‘아이유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 편의점은 몇 개 정도 될까요?’ 등이다. 정답은 없지만 논리가 필요한 질문이다.
“면접은 개인을 압박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논리 회로를 제대로 쓸 수 있도록 독려하고 기다려주는 시간이죠. 절대 말을 끊는다거나 면박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임경호 커뮤니케이션 프로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블랭크 코퍼레이션으로 옮겨왔다. 그의 삶에 ‘도전’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처음에는 ‘통제도 없고 규칙도 없어 보이는’ 문화가 낯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적응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통제의 문화가 있고 신뢰의 문화가 있죠. 블랭크 코퍼레이션은 후자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자율적으로 일할 때 몰입도와 성취도가 더 높아진다는 걸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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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스테디셀러 ‘마약베개’
2 반려동물을 위한 상품 브랜드 ‘아르르’
3 수돗물을 걸러주는 필터 ‘블러썸’
4 또 하나의 히트 상품 ‘악어발팩’ ⓒ블랭크
블랭크 코퍼레이션에는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가 공존한다. 남성 뷰티 브랜드인 ‘블랙몬스터’와 더마코스메틱 브랜드인 ‘닥터원더’는 꾸준한 인기를 모으는 스테디셀러다. 여기에 반려동물 제품, 리빙 브랜드, 식음료 브랜드 등이 새로운 히트 상품으로 떠오른다. 이들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3분기 매출은 980억 원이다. 지난해 대비 223%의 성장이다. 2017년 전체 매출은 500억 원이었다. 이 역시 2016년 매출 42억 원과 비교하면 10배 이상의 성장을 이루었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블랭커 모두의 고민일 겁니다. 지난 8월 대만 법인을 설립하고 모바일 보급률이 높은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콘텐츠 커머스’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어요. 대만에서 매출 12억을 달성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저희 고민은 ‘인류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까지 나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랭크 코퍼레이션의 성공으로 이미 업계에는 비슷한 ‘미투’ 상품이나, 대부분의 콘셉트를 모방한 ‘카피캣’ 상품도 쏟아졌다. 숱한 고민 끝에 제품을 내놓은 프로들에게는 뼈아픈 일이지만, 이 역시 감당할 부분이다.
“저희만 만들어서 저희끼리 1등 하는 것보다 전체 시장이 커지고 그만큼의 파이가 커지는 게 더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빈칸(블랭크)을 찾아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게 저희 몫이죠.”
블랭크 코퍼레이션이 공유하는 ‘논리적 사고’의 흐름
A. 기회 발견, 문제 인식 어떤 문제(기회)를 해결할 것인지 탐색한다.
B. 기댓값 측정 투입되는 리소스(시간, 인력, 자본)에 비해 기댓값이 높은지 예측한다.
C. 기회비용 사고 같은 리소스를 활용했을 때 기댓값이 더 높은 다른 기회(문제)는 없는지 탐색한다.
D. 강점주의 사고 우리가 가진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문제(기회)인지 진단한다.
E. 우선순위 사고 지금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지 진단한다.
F. 리스크 체크 예상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상식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분석한다.
G. 가설 설정 투입할 리소스와 목표치를 설정한다.
H. 변수 제거 예상되는 변수 중 결과 값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변수를 탐색하고 제거한다. 단, 모든 변수를 제거할 필요는 없다.
I. 가설 검증 진행 리소스를 투입하면서 기댓값은 어떤지 변동을 체크한다. 가설 검증 단계에서는 시간과 리소스를 줄이는 직관을 적절히 활용한다.
J. 가설 검증 완료 및 업무 진행 기댓값, 기회비용, 강점주의, 우선순위, 상식, 리스크 등을 재고려해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