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방’이라 하니, 어두운 조명 아래 먼지가 켜켜이 쌓인 구석마다 테레핀 오일 특유의 냄새가 배어나오는 어느 공간이 그려진다. 그곳을 채운 이들은 미술가 또는 미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일 터. 그러나 웬걸. ‘투핸즈’에 들어선 순간, 앞선 생각은 낯선 공간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깨닫는다. 너른 진열대 위로 각종 미술 재료가 말끔히 정돈돼 있고, 차 전문점 못지않게 향긋한 홍차 향이 은근하게 퍼져 있다. 그 안으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데 미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여럿이다. 투핸즈의 존재 이유이자 지향점이다.

▶ 유민석 대표가 투핸즈 한편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투핸즈를 한 단어로 정의하기란 꽤 어렵다. 대표인 유민석 작가마저도 간결하게 설명하는 데 애를 먹었을 정도다. 질문을 바꿔 어떤 사람들이 오는 곳이냐고 묻자 유민석 대표는 “누구든지”라고 답했다. 투핸즈는 ‘누구나 들를 수 있는 차향이 나는 화방’인 셈이다.
유민석 대표는 피카소가 단골이었다는 프랑스 시넬리에를 비롯한 외국 화방을 갈 때마다 부러움이 앞섰다. ‘내가 이 나라 화가로 태어났더라면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었을 텐데….’ 미술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몰려드는 개방적인 화방이 국내엔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그런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여기 참 성격이 애매하죠? 없었던 공간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라요. 대개 미술은 어려운 영역이라고 여기잖아요. 미술 전시장이 숨 막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미술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미술을 매개로 더 많은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이 있었으면 한 거죠.”

▶ 물감, 연필, 붓 등 미술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이 말끔하게 진열돼 있다. ⓒC영상미디어
한눈에 담길 만큼 확 트인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여느 화방과 다른 투핸즈만의 성격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중에서도 붓, 물감, 연필 등 미술 작업에 필요한 수많은 재료가 한데 모여 연출하는 광경은 조금 특별하다. 유 대표가 지난 10년 동안 직접 써본 것들 중 가성비가 높고, 인체에 덜 해로운 제품을 중심으로 꼭 알려주고 싶은 재료 위주로 놓았다. 화방을 운영하는 대표이기 전에 화가로서 고민한 흔적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미술 재료 사용법을 알고 있지 못할뿐더러, 재료학을 가르치는 국내 교육과정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유 대표의 이야기다. 이를테면 어떤 재료는 사용할 때 주변에서 음료를 마시면 안 된다. 마시는 도중 공기를 타고 독성물질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의사항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했다. 그 역시 재료에 관한 지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던 화가다. 화방에서 배운 적은 있으나 교육자가 비전문가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독성 있는 재료가 생각보다 많아요. 잘못 사용하면 작품 질을 떨어뜨리는 것도 문제지만 건강에 안 좋은 게 더 심각하죠. 은사님들이 ‘나이 들면서 유화는 못 하겠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건강 때문이었더라고요. 저도 오랜 작업을 할 때면 어지러움을 느낄 때가 있었어요. 재료학을 공부하면서 위험 재료를 함부로 사용해오고 있었단 걸 알았어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싶었고 그걸 실현하는 공간이 투핸즈예요.”
가성비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외국과 국내 판매가가 차이가 너무 클 경우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또 평가가 좋아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물감을 소개하기도 한다. 역량 있는 요리사도 좋은 식재료 없인 최고의 요리를 내놓을 수 없듯 화가에게도 적합한 재료 사용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틈틈이 강단에 올라 재료학 강의를 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열린 화방
굳이 따지자면 투핸즈는 화방임이 분명한데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미술과 관련 없는 사람들도 단골이 될 수 있다. 카페인 줄 알고 왔다가 공간에 흥미를 느끼고 다시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 미술에 관심은 있었지만 접할 기회가 없어 포기했던 사람, 시간 때우기 용도를 찾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 1 투핸즈에서는 비전문가들도 자유롭게 미술 작업을 할 수 있다. 2 한 작가가 투핸즈에서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C영상미디어
“최근 들어 비전문가 방문객이 많아진 걸 느껴요. 손님은커녕 문의 전화도 없었던 때와 비교하면 감사할 따름이죠. 미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을 모아보고자 했던 목표를 천천히 실천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유 대표는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다. 화방이 꼭 화가들만의 공간이 아니며 미술은 특정 사람만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주려는 의도다. 수업 신청자가 배우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야기한 뒤 그것을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작가를 연결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미술을 배워본 적 없다던 중년 여성이 몇 차례 수강을 하더니, 최근 개인전까지 연 이야기를 전했다.
“투핸즈가 활성화되려면 관심도를 높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10~20년 전에도 아침마다 텔레비전 방송에 유명 요리사가 요리법을 알려줬지만 대중 반응은 어땠나요? 관심조차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모 요리 전문가가 쉽고 재밌게 요리를 가르치니 사람들이 열광했죠. 미술도 마찬가지예요. 어렵지 않게 알려줘야 더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어요.”
투핸즈는 여러 의미를 가진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공간’, ‘그림 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만남’, ‘사람 손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가치 잃지 않기’가 그것들이다. 화방 한편에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고 있는 건 ‘함께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이다.
유 대표는 재정적인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는 작가들을 볼 때마다 속상함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경력이 짧은 작가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많이 판다 해도 워낙 낮은 가격이 책정돼, 오히려 적자 위기를 맞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런 작가들에게 투핸즈는 고마운 판로다.
“엽서나 접시, 컬러링북 등에 작품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어요. 해당 작가는 수익을 얻는 동시에 홍보도 가능한 셈이죠. 손님들의 반응을 보면서 힘을 얻는 작가들도 많고요.”
신진 작가에게 판로 역할도
초대전 개최 기회를 얻은 작가도 있다. 이 작가는 투핸즈에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완성한 결과물을 벽면에 걸곤 했다. 우연히 이곳을 찾은 갤러리 관계자가 작품을 보고 초대전을 제안했다고 한다. 유 대표는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상영하지 않는다거나 언제 상영하는지 홍보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전시도 이런 방법으로 미리 홍보하는 게 어떨까라는 단순한 발상이었다”면서 “더 많은 작가에게 기회가 올 수 있도록 화방 안 전시 그림을 자주 바꾼다”고 말했다.
투핸즈는 카페로서 기능도 한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을 넘어 작가들끼리, 작가가 아닌 사람들끼리 교류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됐으면 하는 유 대표의 바람이다.
“복잡한 동선에 제품만 있다면 그저 쇼핑몰에 머물렀을 겁니다. 대화가 있으려면 차 한 잔이라도 곁들일 수 있어야겠더라고요. 화방이나 갤러리로는 충분한 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끝에 내놓은 자구책이랄까요?”
화방 귀퉁이 작은 공간은 유 대표의 작업실이다. 자신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설치한 공간이라고 했다. 작업하다 보면 지나던 사람들이 와서 “사진 찍어도 되나요?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된다. 이곳은 그에게 일종의 개인 방송이다. 미술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예술의 문턱을 낮추려는 의도다.
그가 투핸즈를 구상에 그치지 않고 열기까지 가능하도록 한 건 미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전시를 열었을 때 현지 가정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어요. 그 집 딸아이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대요. 나중에 그림을 보고 말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수집했다고 해요. 그림이 줄 수 있는 에너지란 그런 게 아닐까요. 우리나라에선 미술과 관련된 이들이 모여 있던 지역들이 다 발전했어요. 홍대, 합정, 상수, 연남동이 대표적이죠.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술에서 비롯된 영감이 문화를 만들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거니까요. 투핸즈도 그랬으면 해요. 미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소통 문화를 형성하는 공간으로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