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오일시장에 헛걸음을 한 뒤 시장 주변 주택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꽃밭을 발견했다.│우희덕
여행하는 삶에 관하여라고 썼지만 어쩌면 그것은 여행 같은 삶에 관하여다. 내게 제주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라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이다. 무엇이 맞는 것이든 하나의 명제만큼은 변함이 없다. 삶은 여행이다.
가끔씩 내가 사는 곳이 제주라는 사실을 잊는다. 바로 앞에 아름다운 바다와 오름과 숲을 두고도 누리지 못한다. 집에 틀어박혀 일만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반경 500미터 내에 이렇다 할 상점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선 모든 게 일이고 도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서 치열하게 사는 후배가 전화로 사는 법을 말해준다.
살아가니까 살아지네요.
여행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여행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여행을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면 여행하는 삶은 누구나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누군가에게는 도시가 여행지인 것처럼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거리에 실제로 가보지 못한 곳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려보면 이해가 더해질 것이다.
나는 일상의 여행을 좋아하고 스치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아무 옷이나 입고 밖을 나서도 제주의 배경은 나를 여행자로 만든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봄날의 제주는 어디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달력 사진이다. 차로 서귀포에 있는 대정오일시장을 향한다. 도로를 따라 유채꽃과 벚꽃, 각양각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봄을 잊지 않고 깨어나는 생명의 경이로움만큼 신비로운 순간을 마주한다. 마치 누가 나를 위해 교통 신호를 통제한 듯 멀리서 빨간색이었던 신호가 때를 맞춰 파란색으로 바뀐다. 단 한 번의 막힘없이 길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얼굴에 기분 좋은 바람이 스친다.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어느덧 대정오일시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주차장이 텅 비어 있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끝자리가 1과 6인 날에 열리는 오일장. 오늘은 분명히 1일인데도 시장에 정적이 감돈다. 맑은 봄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인근에서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발견하고 왜 시장이 열리지 않는지를 물었다. 노인이 어려운 질문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답한다. 어제가 31일이었다고. 31일에 장이 열릴 때는 1일에는 열리지 않는다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아무것도 사지 못한 시장에서 깨닫는다. 여행은 그런 것이고 삶은 이런 것이다. 시장 주변 주택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꽃밭을 발견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희덕 코미디 소설가_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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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