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3월 2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란전에서 승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대한축구협회
파울루 벤투 감독이 해방 이후 역대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사령탑 가운데 가장 오래 지휘봉을 잡으면서 스포츠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독이 든 성배’라는 말처럼 축구대표팀 감독의 자리는 늘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2018년 8월 부임한 벤투 감독은 3년 8개월째 팀을 이끌고 있고 2022 카타르월드컵도 지휘한다.
감독에 대한 오랜 신뢰가 반드시 성과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대표팀을 이끌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2년 9개월 동안 팀을 지도했지만 막판 성적부진으로 경질됐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팀이 성과를 낸 경우가 훨씬 많다. 가령 2002 한일월드컵에서 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때 강팀과 평가전에서 줄줄이 대패하면서 ‘오대영’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1년 6개월간 흔들림없이 자리를 지키면서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다. 허정무 감독도 2010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국내파 감독 가운데 역대 가장 긴 2년 6개월을 선수와 동고동락했는데 사상 첫 원정 16강 성과를 일군 바 있다. 카타르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벤투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이유다.
대표팀 축구의 색깔로 자리잡은 빌드업
물론 역대 최장수 축구대표팀 사령탑이 된 벤투 감독에게도 시련은 많았다. 2021년 3월 일본과 평가전 0-3 패배가 대표적으로 당시 팬들의 실망감은 컸다. 2021년 9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1~2차전 때도 위기는 있었다. 안방에서 열린 1차 이라크전에서 무승부(0-0)를 기록했고 2차 레바논전(1-0 승)에서는 후반 권창훈(김천 상무)의 천금 같은 골로 간신히 이겼다. 중동팀을 상대로 원정 변수 등 부담이 있는 상황에서 A조 하위권 팀들을 압도하지 못하자 팬들이 벤투 감독의 지도력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벤투 감독한테는 행운이 따랐다. 코로나19로 평가전 등이 줄어들면서 벤투 감독의 일본전 졸전은 집중포화를 맞는 대신 일회성 사건으로 묻혔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초반 부진이 미풍으로 그치면서 위기를 벗어난 벤투호는 3~7차전에서는 4승 1무로 쾌속항진하며 일찍이 10회 연속 본선행을 확정하고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축구대표팀이 승승장구하면서 벤투 감독 특유의 빌드업, 점유율, 압박 축구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골키퍼가 긴 패스로 공을 처리하지 않고 짧은 패스를 통해 전진해나가는 빌드업 축구는 공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를 위해서는 영리한 공 처리와 일대일 능력, 약속된 플레이가 이뤄져야 한다.
벤투호는 초기에 후방 패스 차단에 따른 위험 노출이나 횡패스 남발 등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최종예선 10차례 경기를 거치면서 빌드업은 대표팀 축구의 색깔로 자리를 잡았다. 프로축구 K리그에서도 대표팀의 영향으로 빌드업, 패스, 빠른 공수전환, 압박 축구가 확산되고 있다.
경기 2~3일 전 소집돼 발을 맞출 기회도 적은 상황에서 성적을 냈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벤투 감독은 다양한 전술을 시도하기보다는 반복 훈련에 의해 팀 조직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김민재(페네르바체) 등 수비수들은 “소집 때마다 비슷한 전술이어서 편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선수 선발 때마다 새 인물을 발굴하기보다는 보수적으로 선수를 호출하면서 비난도 많이 들었지만 짧은 소집훈련 여건에서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시아 무대와 달리 월드컵 본선에서 맞설 상대들은 수준이 훨씬 높다. 우리보다 전력이 약한 아시아팀들을 상대로 빌드업이 통했다고 하더라도 본선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속한 본선 H조에는 포르투갈, 우루과이, 가나가 포진해 있는데 국제축구연맹 순위에서 우리는 가나에만 앞서 있을 뿐이다.
엔트리 늘면 새로운 인물 추가 발탁 가능성
이런 걱정에 대해 벤투 감독은 “지금까지 했던 빌드업을 바꾸는 것도 문제가 있다.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큰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수비지역에서 패스 실수 등은 정교하게 다듬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월드컵 주전 명단과 관련해 “아직 이르지만 기본 토대는 있다. 또 새로운 선수들한테 언제든지 문은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6월 네 차례, 9월 두 차례 예정된 평가전은 대표팀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다. 김대길 KBSN 해설위원은 “본선 조 편성이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수월한 상대도 없다. 평가전 때는 가능한 한 강팀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상대 지배력이 높은 상태에서 우리 수비의 대처 능력을 점검, 평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손흥민(토트넘)이라는 세계적인 스타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유리한 점이다. 손흥민의 경우 큰 경기에서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결정력을 갖추고 있다. 골이 아니더라도 상대 수비 두세 명을 한 쪽으로 끌어내 동료 선수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
월드컵 엔트리가 기존의 23명에서 26명까지 늘어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국내 무대로 돌아온 이승우(수원FC)를 포함해 새로운 인물을 추가로 발탁할 수 있다. 취약한 고리인 좌우 측면 수비도 보강해야 한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벤투 감독이 오래 맡으면서 팀이 단단해졌다. 우리 선수 개개인의 능력도 있기 때문에 카타르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김창금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