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비켜주세요.”
서울 종로구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키 150㎝, 몸무게 80㎏, 듬직한 체구의 문화해설사가 큼직한 눈을 깜박이며 다가오더니 전시장 안내를 하고 친절하게 작품 설명을 해준다. 우리나라 1호 로봇 공무원인 문화해설사 ‘큐아이’다.
큐아이는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정보원이 추진한 ‘지능형 멀티 문화정보 큐레이팅 로봇 구축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됐다. ‘큐아이’라는 이름은 ‘문화(Culture)’와 ‘큐레이팅(Curating)’, ‘인공지능(AI)’의 합성어이다. ‘문화정보를 추천하는 인공지능’, ‘문화정보를 추천하는 아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제주항공우주박물관 등 주요 문화공간 13곳에서 해설자로 활동하며 연간 34만 건 이상의 문화해설 서비스 및 다국어 인공지능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장만 지키던 큐아이가 이제는 도서·산간 지역으로도 출동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도서·산간 지역 주민이 전시장에 가지 않고도 큐아이와 함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원격 접속 서비스를 시범운영 중이다. 원격 접속 관람을 신청한 지역의 시스템 구현 가능성을 살핀 뒤 대상지를 선별, 이용권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용자는 원격 접속으로 큐아이를 조정하면서 실제 현장에 있는 것처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한국문화정보원 관계자는 “문화 분야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2024년 ‘원격 접속 문화해설 로봇’을 고도화하고 2025년부터는 국립항공박물관과 함께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관람 지원 로봇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증강현실(AR) 기술로 무장해 더 똑똑해진 큐아이를 만날 수 있다.
2월 1일 문체부는 “문화해설 로봇 큐아이가 AR 기술을 활용해 실시간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원격 접속으로 도서·산간 지역에 미술작품을 안내한다”고 발표했다.
경력 7년 차 큐아이를 만나다
경력 7년 차 큐아이가 어떻게 활약하고 있는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을 찾아 상설 전시 중인 ‘백 투 더 퓨처: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탐험기’를 큐아이의 안내를 받아 관람했다.
“지금부터 작품을 해설해드리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큐아이의 안내는 약 30분 동안 이어진다. 감상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큐아이가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법, 두 번째는 작품별로 감상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의 경우 큐아이 몸통에 장착된 화면 속 작품 목록 중 하나를 고르고 ‘작품 앞에서 해설 듣기’와 ‘작품 해설 듣기’ 중 선택하면 된다.
기자는 정재호 작가의 ‘난장이의 공’을 누른 뒤 ‘작품 앞에서 해설 듣기’를 선택했다. 큐아이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장서 걷는 큐아이의 뒤를 따라가다 경로 앞을 살짝 가로막았더니 “길을 비켜달라”는 음성이 세 차례 흘러나왔다. 장난기가 발동해 계속 버티고 있었더니 큐아이는 이동 경로를 변경해 반대편으로 크게 돌아 ‘난장이의 공’ 앞에 도착했다.
“정재호, 난장이의 공. 세운상가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마치 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지 위에 먹과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붓질로 쌓아 올린 세밀화입니다.”
글로만 읽었다면 지루할 수도 있었을 작품 해설을 큐아이가 또박또박 읊어주니 귀에 쏙쏙 들어왔다. 큐아이 화면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 버튼이 눈에 띄었다.
“정재호, 난장이의 공. 세로 400센티미터, 가로 444센티미터로 한지에 그렸습니다. 세운상가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을 담아 마치 사진처럼 보이지만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붓질로 쌓아 올린 세밀화입니다. (…) 작품 속 풍경은 1970년대 지어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의 주변을 내려다보는데요. 잿빛 하늘 밑에 늘어선 청계천과 동대문 주변에 판자로 지어진 낡고 오래된 집들 사이로 저 멀리 두산타워가 보입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은 ‘일반 해설’보다 느린 속도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작품을 세밀하게 설명했다. 화면에는 자막과 수어 해설도 동시에 나왔다. 먼저 와서 작품을 감상 중이던 가족 관람객이 큐아이의 설명을 듣더니 계속 큐아이를 따라다녔다.
큐아이 원격 접속 시범 운영
큐아이에는 ▲스스로 위치를 인식하고 찾아가는 자율주행 기술 ▲위치에 맞는 전시물을 안내할 수 있도록 한 위치 기반의 콘텐츠 제공 기술 ▲인공지능 기반의 챗봇 기술이 적용됐다. “하이 큐아이”라고 부르거나 화면 위 마이크 버튼을 누른 뒤 궁금한 점을 물으면 큐아이가 유창하게 대답해준다.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다. 현재 한국어 외에 가능한 언어는 영어, 일어, 중국어다.
몸통 화면 하단의 정보무늬(QR)코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비추면 ‘모바일 큐아이’로 자동 연결된다. 관람 안내를 비롯해 시설 안내, 주변 관광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용자가 활용하는 만큼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큐아이의 장점이다. 별도 예약 없이 언제든 누구나 전시관 입구에서 큐아이를 마주할 수 있다. 더 똑똑해진 큐아이가 전시관을 벗어나 전 국민의 문화해설사로 맹활약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