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동대문역 6번 출구는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번화한 대로변 뒤 구두시장과 완구시장을 지나면 미로처럼 복잡하고도 좁은 길이 나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동감 넘치던 도심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동네다.
‘쪽방’은 말 그대로 한 방을 여러 개로 쪼갠 1평(3.3㎡) 남짓한 방이다. 이런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 쪽방촌이다. 창신동 쪽방촌은 종로구 돈의동, 중구 남대문로5가, 용산구 동자동, 영등포구 영등포동과 함께 ‘서울 5대 쪽방촌’에 속한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빈곤층이 모여들면서 조성됐다.
이곳을 한 달에 한 번씩 찾는 한의사들이 있다. 20~30대 한의사 6명과 간호사 1명으로 구성된 ‘온기를 전하는 한의사들(이하 온전한)’은 2023년 1월부터 정기적으로 의료봉사를 해오고 있다. 사회복지시설인 창신동쪽방상담소 소속 김현기 간호사와 평소 친분이 있던 임석현 한의사 2명으로 시작해 2024년 1월 7명(송은성·최일훈·유창환·이재학·박종일 한의사 순차 합류)이 됐다. 온전한은 매달 약속한 토요일 오전 창신동쪽방상담소에 모인다. 골목 깊숙이 여전히 추위가 머무르고 있던 1월 말, 7명은 흰 가운을 걸치고 창신동쪽방상담소를 나와 골목길로 들어섰다.
“얘기할 곳이 어딨어… 한의사들만 기다려”
한 줄로 서서 걸어야 할 만큼 비좁은 길이 이어졌다. 대다수 현관문은 녹슬거나 부서진 채로 있었다. 주민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던 김 간호사가 걸음을 멈췄다. 일주일 전 의료 봉사 일정을 공지한 뒤 진료를 신청한 주민들의 거주지를 방문하는 방식이다. 김 간호사가 “안녕하세요, 한의사들입니다”라고 외치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임석현 한의사와 이재학 한의사는 김 간호사를 따라 들어가 두 개 방문을 각자 두드렸다. 그 중 한 문이 열리며 주민이 얼굴을 내밀었다. 임 한의사가 그 방에 들어가자 나머지 한의사들은 2층으로 움직였다. 허리를 한껏 숙이고 벽을 짚으며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정돈되지 않은 복도 양 옆으로 또 다른 방문들이 이어졌다.
“○○ 할머니 계세요? 한의사들 왔어요. (…) 아이고, 오늘 날이 좀 풀려선지 다들 외출하셨나봐요.”
쪽방촌 주민들은 일세나 월세를 간신히 내며 살아간다. 두 발을 편하게 뻗기도 어려운 방 한 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부엌 대신 휴대용 가스버너를, 화장실 대신 페트병을, 장판 대신 종이상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쪽방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2023년 4월 합류한 최일훈 한의사는 “처음 봉사하러 온 날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구나’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신경 써서 정장을 차려입고 왔는데 방바닥에 깔린 라면 국물에 바지가 젖었다”고 떠올렸다. 최 한의사는 “초반에는 이곳 환경이 무척 낯설었다”면서 “찾아뵐 때마다 어르신들이 반겨주는 덕분에 ‘보람된 일을 하고 있구나. 사회에 쓰임이 있구나’를 느낀다”고 말했다.
온전한은 처음부터 ‘찾아가는’ 의료봉사 시스템은 아니었다. 환자들이 진료를 받으러 찾아오는 식이었는데 쪽방촌 주민들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연로해 직접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발표한 2019년 기준 쪽방 거주자의 평균 연령은 66.2세다.
온전한은 진료를 우선으로 하되 주민들이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식사는 건너뛰지 않았는지 일상부터 묻는다. 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70대 홍 모씨는 송은성 한의사에게 “갈수록 의기소침해진다. 피붙이가 어딘가 있긴 할 텐데 몇 십 년 동안 쪽방을 전전했으니 찾아가기도 창피하고. 얘기할 사람도 없으니 자꾸 선생님 오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 말했다.
홍 씨는 동네에서 ‘피카소 할아버지’로 통한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소문이 날 만큼 그리기 실력이 뛰어나다. 홍 씨의 방은 몸 누일 틈을 제외하곤 도화지와 그림 작품으로 빼곡했다. 송 한의사는 “창피해 할 일이 아니다. 밖에 나가서 종교 활동도 하고 목욕탕도 다니면서 그림 자랑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홍 씨의 두 손을 잡아줬다.
“골목 곳곳에 온기가 전해지도록”
온전한은 눈에 보이는 상처 외에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의사가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치료 받는 사람의 마음이 크게 변할 수 있다고 느낀다. 임석현 한의사는 “언젠가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를 40분 동안 들어드린 적이 있다. 마지막엔 ‘이제 후련해졌다’고 하시더라”며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임 한의사는 항상 마사지건(마사지 기기)을 들고 다닌다. “침을 무서워하는 분들이 계셔서 치료 전에 (마사지건으로) 긴장을 풀어드린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송 한의사에 따르면 증상을 과장되게 말하는 주민들도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치료를 원해서라기보다 쪽방을 찾아온 ‘온기’가 조금 더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송 한의사는 쪽방을 나올 때마다 “또 올게요”라는 인사를 꼭 덧붙인다. 그는 “온전한은 의료보다 복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을 의료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다”며 “더 자주 진료를 해드리지 못해도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온기를 드리는 게 아니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처음으로 온전한 활동에 나선 박종일 한의사는 “실제로 본 쪽방촌의 모습은 예상보다 훨씬 열악하더라. 그렇지만 주거환경이 열악한 것이지 주민 분들의 마음까지 열악한 게 아니다”라며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구성원들은 온전한의 규모를 조금씩 늘려 더 많은 한의사가 봉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창신동 골목 안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환자는 물론이고 온기가 닿지 못한 어딘가의 환자들을 돌보겠다고 한다. 온전한 7명은 다음 달에도 창신동 쪽방촌 골목을 누비며 온기를 나눌 것이다. 이근하 기자
박스기사
숨은 위기가구를 찾아라!
위기정보 44종으로 확대… 복지 사각지대 집중 발굴
“한파는 홀로 계시는 어르신과 반지하, 쪽방촌 등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분들에게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 누구 하나 홀로 방치되지 않도록 정부가 미리미리 나서야 한다. 관계부처는 취약계층의 안전을 한 번 더 살피고 촘촘하게 챙겨주기를 당부한다.”
2023년 12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제54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정부는 취약계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지원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한파가 찾아든 지난겨울 행정안전부는 사회복지공무원과 이·통장 등이 홀몸 어르신과 쪽방촌 주민의 거주지를 방문하거나 유선으로 안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방자치단체와 협조해 ‘복지 위기가구’ 발굴에 활용되는 위기정보를 기존 39종에서 44종(재난적 의료비 지원대상·채무조정 중지자·고용위기 정보·수도요금 및 가스요금 체납정보 추가)으로 확대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을 집중적으로 발굴했다.
이에 더해 산업통상자원부는 등유·액화석유가스(LPG)로 난방을 하는 취약계층 가구를 대상으로 난방비를 지원했다. 대상 가구당 최대 59만 2000원을 카드 형태로 지원받으며 이는 6월 30일까지 난방용 등유·LPG 구입 시 신용카드처럼 사용할 수 있다.
봄을 맞아 소방청은 화재예방대책을 실시하는 가운데 쪽방촌과 주거용 비닐하우스 등 주거 취약시설에 의용소방대원이 주기적으로 현장을 방문하도록 한다. 기초소방시설을 보급하고 환절기 난방용품 안전 사용수칙 당부 등 안전한 주거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이밖에도 행안부는 ㈜맥키스컴퍼니와 협력해 ‘이제우린’ 소주 50만 병에 복지상담창구 홍보 라벨을 붙여 전국 가정용으로 유통한다. 정부가 제공하고 있는 복지·안전서비스 대상 및 지원 방법을 알림으로써 숨은 위기가구 발굴과 복지자원을 연계할 계획이다. 병 뒷면 보조라벨에는 ‘힘들 땐 129(보건복지상담센터) 또는 가까운 읍·면·동 사무소(행정안전복지센터)에 꼭! 전화 또는 방문하세요’라는 문구가 기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