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차향을 세계로! 이현정 ‘이한영차문화원’ 원장
전남 강진 월출산 골짜기에는 고려시대부터 자생해 온 야생차가 가득하다. 그 남쪽 기슭에는 국내 최대의 차밭으로 꼽히는 강진차밭이 펼쳐진다. 차밭을 걷다 보면 호남 3대 정원인 ‘백운동원림’을 만날 수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시절 차문화를 즐기고 제다법을 완성한 곳이다.
다산의 제다법은 다신계를 통해 이어졌다. 다산과 제자들의 신의와 우정의 증표로 결성된 모임인 다신계는 매해 봄마다 차를 만들어 그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낸다는 약속을 맺었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이자 백운동원림의 5대 동주였던 이시헌(1803~1860)은 그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고 후손들에게도 제다법을 물려줬다.
다산 제다법 제자들 통해 계승
다산의 제다법은 이시헌의 손자뻘인 이한영(1868~1956)에 이르러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를 탄생시켰다. ‘이한영차문화원’의 이현정 원장을 만나 강진 차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봤다. 이 원장은 이한영의 직계 고손녀이다.
이 원장은 ‘한국 전통제다법’ 등에 대한 연구로 학계에서 주목받는 호남의 차 학자이자 차 전문가다.
그는 “강진은 예로부터 차 재배의 적지로 손꼽히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찻잎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온도, 햇빛, 수분이 중요한데 강진 월출산 남쪽 자락은 연중 기온이 13.5℃로 온화하고 적절한 강수량을 가지고 있어요. 또 차밭을 품은 월출산이 매서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은 탁 트인 양지로 일조량이 풍부합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다양한 지리지가 전남 강진을 차산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진차밭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에서 차문화가 가장 발전했던 것은 고려시대로 한반도에 불교문화가 융성했고 차문화도 전성기를 맞았지요. 차는 귀한 것으로 여겨져 국가 간의 예물 및 왕의 하사품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왕과 귀족, 관리와 백성들까지 즐겨 마시게 되면서 그 수요가 대단히 많아졌어요.”라고 말했다. 고려시대 차문화 확산은 다구의 수요와도 연결됐는데 양질의 토양, 기후, 발달된 바닷길을 갖춘 강진에서 고려청자가 발원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조선시대 들어 불교문화와 함께 쇄락하던 차문화는 다산 정약용에 의해 부활했다. 다도의 대가였던 정약용이 체계화하고 실용화한 전통제다 지식은 일제강점기에 위기를 맞았다.
일본이 전남 일대에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고 조선의 차와 노동력을 수탈해 만든 차를 일본상품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다산의 제다법을 계승한 이한영은 현실을 개탄하며 고유의 차 상표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탄생한 것이 백운옥판차이다. 백운동(백운동원림)의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의미이다.
“당시 차 생산 방법은 ‘다신계’로부터 온 것으로 당대 구축된 채엽과 제다의 공동생산, 다원관리와 제다법의 표준화로 우리나라 근현대 차산업의 단초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원장의 설명이다.
“월출산 차 콘텐츠는 보물”
이 원장이 처음부터 가문의 역사를 이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물처럼 마셨던 차인지라 크게 중요성을 못 느꼈다는 그는 광주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인연이 된 다례원 원장의 권유와 마음의 이끌림에 따라 차 공부를 시작했다. 2013년부터 연구에 뛰어들어 ‘강진 백운옥판차 고찰’, ‘한국 전통제다법에 대한 융복합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작업을 통해 가문의 유산이 보물임을 발견하고 “한국 차 문화의 새 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원장은 월출산 일대 차 콘텐츠가 세계적인 자원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직접 야생 찻잎을 채취해 차를 만들고 차 상품을 기획하며 유통을 맡고 있다. 백운옥판차와 월산차의 전통을 이어 차를 제조·생산하고, 차문화공간 백운차실을 운영하는 농업법인 ㈜이한영생가의 대표이자 월출산 일대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는 등 경계없는 크리에이터(창작자)로 맹활약하고 있다.
2021년 농림축산식품부 농촌 유휴시설 리모델링 사업, 2022년 전남 대표 웰니스 관광단지 선정, 한국관광공사 주관 관광벤처기업 선정, 2023년까지 진행되는 남도특화경관 이한영 역사공원조성사업 등 정부 주관 사업들은 물론 차소풍, 차여행 등 강진 차문화를 통한 지역관광상품도 활발하게 개발 중이다.
백운옥판차가 지켜온 신의(信義)의 정신은 대를 이어 월출산 자락 아래 성성한 차나무들처럼 오늘도 살아 숨쉬고 있다.
김일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