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요즘 세계적으로 케이푸드가 인기 많은데 이중 삼겹살의 활약이 단연 눈에 띈다. 또한 한류드라마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찾는 외국인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에겐 말할 필요도 없다. 삽겹살은 직장 회식이나 가족 외식 인기 메뉴 가장 위쪽에 늘 이름을 올린다. 대중가요, 영화, 시, 소설 등에도 삼겹살이 ‘출연’한다. 고작 가축의 특정 부위(돼지의 갈비 밑 뱃살)인데 우리 삶 속에 이토록 깊이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이쯤 되면 삼겹살을 빼고 현대의 한식을 이야기할 수 없다. 송년회나 모임이 많아지며 밤이면 곳곳에서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의 역사를 한번 구워봤다.
1959년부터 등장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갑자기 삼겹살이란 단어가 대유행했다. 개그맨 고 김형곤이 ‘공포의 삼겹살’로 자칭하며 이 생소한 이름을 알린 공로자다. 로스구이라 부르던 것을 이후 너도나도 삼겹살이라고 외쳤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 행진이 시작됐다. 그 인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삼겹살의 유행으로 수출만 하던 돼지고기가 오히려 내수용으로 부족해졌다. 경제 성장에 힘입어 식생활이 개선되니 서민들이 고기를 찾기 시작했다. 1978년 초 국내 돼지고기 부족 현상이 일자 정부는 수급 안정화를 위해 수출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만(당시 자유중국)에서 시험적으로 냉동육 300톤을 수입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0년대 중후반쯤엔 거의 모든 식당에서 삼겹살을 팔았다. 그냥 밥집이나 선술집에서도 냉동실에 뒀던 시꺼먼 봉지 속 삼겹살을 꺼내 프라이팬에 얹어 팔았다.
삼겹살의 대유행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 정육점마다 도입된 냉동 육절기와 식당의 가스 화덕, 엉뚱하게도 소주가 그 주인공이다. 삼겹살을 구워 먹기 좋게 되도록 얇게 썰 수 있었던 건 냉동 유통 시스템과 육절기 덕분이었다.
소주는 어떻게 삼겹살 대중화에 기여했을까. 막걸리 중심의 술 문화가 희석식 소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65년. 식량난에 따라 정부가 쌀로는 모든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원년이다. 몇 년이 지나도 밀 막걸리가 입에 맞지 않았던 이들에게 원래부터 쌀은 주정이 아니었고 그나마 저렴했던 희석식 소주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1977년 전국 희석식 소주 통폐합 과정을 거치며 회사별 유통 구조가 개선되니 다들 소주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상을 묘사한 우리나라 영화와 소설 등 대중문화에도 이전에는 막걸릿집 일색이었던 것이 1970년대 중반부터는 소줏집 배경 일색으로 스크린에 투사됐다.
1980년대 들어 마침 삼겹살(로스구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안줏거리가 딱히 필요 없던 막걸리와는 달리 소주에는 배를 채우고 위벽을 보호할 만한 기름진 것이 필요했는데 마침 시중에 풀리기 시작한 돼지고기 로스구이가 딱이었다. 이때 ‘파전에 막걸리’, ‘맥주에 노가리’ ‘삼겹살에 소주’란 공식 아닌 공식이 생겨났다.
육류 유통도 개선돼 전문 축산물 시장까지 가지 않고도 동네 정육점에서 구이용 고기를 쉽게 살 수 있게 됐다. 너도나도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시대가 왔다.
주부 대상 잡지에서는 앞다퉈 삼겹살을 다뤘다. 소금과 후춧가루, 참기름을 갠 기름장에 찍어 먹는 법이 이때 퍼졌다. 돼지고기가 ‘국민 단백질’로 등극한 순간이다.
처음엔 육절기로 썰어낸 냉동 삼겹살과 대패삼겹살이 주류였다가 얼리지 않고 두껍게 썬 생삼겹살로 유행이 바뀌더니 다시 돌고 돌아 냉동 삼겹살이 젊은 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장년층엔 익숙하지만 생고기만 봐온 젊은 소비자들에게 바삭하고 기름이 쫙 빠지는 냉동 삼겹살은 생소한 음식이다. 와인숙성 삼겹살이나 제주 흑돼지 삼겹살 등 방식과 지역에 따른 유행도 시곗바늘처럼 계속 돌고 있다.
삼겹살 맛집
★서울 합정동 천이오겹살
삼겹살 부위에 껍데기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오겹살이다. 씹는 맛이 더 좋다. 냉동 삼겹살과 오겹살로 근 20년간 합정동 골목을 지켜온 집이다. 생오겹살을 구워내면 속은 부드럽고 껍데기 부분은 더욱 쫄깃해진다. 냉동 오겹살도 있다. 떡볶이와 비빔국수, 어리굴젓 등 이것저것 곁들이는 메뉴가 많아 젊은 층에게 인기가 좋은 집이다.
★서울 금호동 금돼지식당
본삼겹 강추. 독특하게 큼지막한 갈빗대가 붙어 있다. 돼지갈비와 삼겹살을 함께 맛보는 느낌이다. 그 덕분에 마니아층이 많다. 두꺼운 고기를 통째 돌려가며 구운 다음 다시 한입 크기로 썰어낸다.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뼈에 붙은 고기가 맛있다. 삼겹살 특유의 진한 맛이 첫맛부터 착착 달라붙는다.
★서울 신촌 대구삼겹살
1977년부터 신촌 지역 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집이다. 냉동 삼겹살을 판다. 테이블은 5개에 불과하지만 단골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시원한 콩나물냉국에 ‘파절이’, 새콤하고 아삭한 김치가 세월을 거스른 채 여전히 상을 지키고 있다. 후춧가루를 뒤집어쓴, 하얀 연골이 딱딱 박힌 삼겹살이 냉기를 머금고 식탁에 오르면 알루미늄 포일을 겹겹이 싼 불판 위에 잠시 올렸다 먹으면 된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