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내 허리께까지 오는 다육과 식물이 있다. ‘세무리아’라는 이 식물은 마다가스카르가 고향이고 세무(스웨이드)처럼 보송보송한 텍스처의 갈색 잎이 특징이다. 잎에 물이 닿으면 세무 결이 사라지므로 분무질은 금지, 뿌리에만 물을 줘야 한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친구이자 지금은 꽃집 사장이 된 윤에게서 이 식물을 구입했다.
윤과 나는 경기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만화를 보는 것도 그리는 것도 좋아해 꽤 친하게 지냈고, 누가 봐도 미술을 전공할 운명이었던 윤은 미대에, 별 재능 없이 만화를 좋아하기만 했던 나는 인문대에 진학했다.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다가 약 5년 전 어느 봄밤, 누리소통망(SNS)에서 다시 만났다. 윤은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다가 최근 서울 은평구에 꽃집을 차렸다고 했다. 나는 윤이 보고 싶기도 했고 마침 근처에서 미팅이 잡혀 있었던 터라 평일 낮에 윤의 가게를 방문했다.
윤은 더는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윤의 가게를 보고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10평(33㎡) 남짓한 가게 안에는 고개를 젖혀야만 가지 끝을 확인할 수 있는 커다란 나무들과 아주 조그만 식물들이 대비를 이루며 배치돼 있었다. 또 지금이야 독특한 수형의 식물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윤은 그때부터 꽃을 비뚤게 심는 등 식물을 이용해 과감한 조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식물을 한 톤의 화분에 담아 서로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윤의 가게는 꽃을 파는 가게라기보다 식물로 디자인한 공간에 더 가까웠다.
윤은 이 동네에 오면 치즈돈가스를 꼭 먹어야 한다며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골목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날 나는 약간 흥분했던 것 같다. 나는 북적이는 돈가스집에서 끊임없이 말했다. 만화를 좋아하던 우리가 회사원이 되다니,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니, 뭐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윤은 내가 하는 말마다 친절히 맞장구를 쳐주었는데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냈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윤에게 꽃집 사장의 삶이 어떤지 물었다. 윤은 자영업의 어떤 점이 좋은지를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최근 모 회사와 일을 했는데 대금 지불이 늦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영업의 어려운 점을 몇 가지 더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런 일을 다 겪었느냐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윤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은경아.”
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소에도 이렇게 불만이 많은 건 아니야.”
나는 돈가스를 집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냥 오늘은 이런 말을 하게 되네.”
윤은 돈가스를 오물거리며 나무 쟁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평소 마음으로 돌아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안다고, 나도 그런 날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날 나는 왠지 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팅 시간이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윤과 수다를 떨다가 손가락 한 개 높이의 식물을 사 왔다. 그것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세무리아다.
세무리아를 보면 그날 윤이 한 말이 떠오른다. 언젠가 내 마음과 다른 말이 입에서 나오면 그날의 윤처럼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이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이토록 하기 어려운 말을 그날 너는 어떻게 뱉어낼 수 있었는지.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동안의 윤의 삶을 상상해본다.
김은경 출판 기획 에디터 겸 작가_ 12년 차 에디터.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를 썼다. 2022년에는 ‘성장’과 ‘실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볼 예정이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