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하늘은 투명에 가깝게 푸르고 곱게 익은 곡식들이 황금빛 물결로 출렁인다. 나무는 가지마다 실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달콤한 향을 풍기고 나뭇잎은 붉게 물들어 노을처럼 빛난다. 가을 풍경 속에서도 가장 빛나는 날은 추석이다. 그래서 추석을 가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뜻의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부른다. 추석 풍경의 백미는 보름달이다.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휘영청 보름달이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주는 것 같다. 때로는 소원을 귀담아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을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가을은 잔인하고 무서운 계절이기도 하다. 이를 일컬어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한다. 가을의 차가운 기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만물을 죽이는 살기라는 뜻이다. 무르익은 과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떨어져 생명을 다하고 무성했던 나뭇잎은 차가운 바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습기를 잃은 땅은 점점 생기를 잃고 말라간다. 일조량이 줄어드니 마음은 울적해지고 날씨가 서늘해질수록 몸은 움츠러든다. 풍요로움이 절정에 이를 때 가을의 숙살지기는 발동된다. 급격한 변화의 시작점에 추석이 있다. 중추가절의 생기와 숙살지기의 살기, 추석이 오면 상극인 두 기운이 어우러지며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자연의 오묘함을 경험하게 된다. 생기는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는 생기를 가여워하지 않는다. 가을이 생기와 살기를 동시에 품는 건 그래야만 겨울이라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석에는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 양면성을 갖는다. 중추가절을 함께 즐기고 싶은 공존의 마음과 번잡함을 떠나 홀로 지내고 싶은 은둔의 마음이 그것이다. 마음 한편에서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함께 차례를 지내며 풍요로움을 즐기고 싶어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낯선 친척들과 형식적인 만남을 피해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서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반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지내는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연의 흐름처럼 공존과 은둔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공존하고 싶지만 함께할 가족이 없어 쓸쓸히 추석을 보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의무적으로 가족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공존 속에서 쉴 자리를 찾고 은둔 속에서 함께할 여지를 남겨두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복작복작한 가족과의 모임 뒤에 잠시 홀로 떨어져 보름달을 완상하며 마음에도 그 따듯한 빛을 전해주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낯선 길을 산책하며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거나 동네 카페에 들어가 차 한 잔의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홀로 집에 머물러야 한다면 시간을 정해 고마웠던 사람, 싫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에 품었던 기억들과 공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 시간만큼은 상대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품어야 한다. 생기와 살기가 어우러져 또 다른 시절을 맞이하는 가을처럼 이번 추석에는 서로 다른 것이 어우러져 새로운 시절을 맞이할 수 있는 지혜의 보름달이 마음에 비췄으면 좋겠다.

신기율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마인드풀링(Mindfuling) 대표이자 ‘마음 찻집’ 유튜브를 운영하며 한부모가정 모임인 ‘그루맘’ 교육센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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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