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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6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는 1,000명에 가까운 외국인이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씨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글날을 며칠 앞두고 열린 외국인 한글백일장대회에 세계 57개국에서 몰린 외국인들이 경연을 벌이는 자리였다.
미국인 변호사 로버트 왁트는 “조만간 한국의 법률시장이 개방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한국어를 익혀야 하는 입장”이라며 “한국어가 어려워 문법이 좀 틀려도 되는 시 부문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인 다니엘 바트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익혔는데, 오슬로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어와 한국사를 공부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국음식 가운데 김치를 가장 좋아한다는 바트는 “맵고 짠 음식이라면 만사 오케이”라고 했다. 이날 외국인 백일장에서 영광의 대상은 탄자니아 출신 여대생 마가릿 비아문구가 차지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을 찾는 외국 유학생도 크게 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4월1일 현재 국내 전문대학 및 4년제 대학과 대학원 등에 체류하는 외국인 유학생이 1만6,832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2003년 같은 시기 1만2,314명에 비해 36% 늘어난 것으로 매년 꾸준한 증가세다.
[B]한국어 어학연수생 전년보다 1천명 증가[/B]
이들 유학생은 한국의 전문대 또는 4년제 대학에서 인문사회계열(4,588명)·이공계열(1,707명)·예체능계열(346명) 등의 학문을 익히고 있으며, 순수하게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어학연수생도 4,520명에 이른다. 특히 어학연수생은 2003년 3,525명에서 1,000여 명 늘어났으며, 국가별로 보면 중국 1,890명, 일본 1,160명에 이어 미국 174명, 말레이시아 121명, 러시아와 몽골 각 103명 등에 이른다.
교육부 국제교육협력과 한영옥 사무관은 “어학연수생 증가는 월드컵 등 국제적 이슈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고, 이와 함께국가 브랜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어학연수생을 비롯한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대한 학구열도 높아졌다. 1994년부터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문화체험학교를 운영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2004년 초 40명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찰 및 안동 하회마을 견학 프로그램을 짰으나, 160명의 지원자가 몰려 진땀을 흘리다 결국 120명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국제교류팀의 윤지현 씨는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한국에 머무르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고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체험 기회를 주고 있다”며 “이 같은 자격 조건을 갖춘 외국인들의 체험 요청이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문예진흥원은 외국 유학생들의 수강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체험학교의 정원을 매년 늘려가고 있다. 1994년 시행 첫해부터 2000년까지 이 프로그램을 거친 외국인이 모두 440명인 데 반해 2002년에는 165명, 2003년 150명으로 정원이 불어났다. 이 학교의 프로그램은 하회별신굿탈춤 강습, 전통악기 연주 감상, 민속박물관 견학, 전통매듭공예 배우기 등이다. 이 같은 과정을 마친 외국인 수강생들이 또박또박 한글로 써 낸 감상문에서도 한국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가득 묻어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층 저와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전통 국악과 매듭을 배운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자리파/카자흐스탄)
‘한국의 절에서 보고 느낀 체험은 평생 간직할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 같아요. 더 많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하루 빨리 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소하/중국)
외국인 유학생 증가세는 아시아권, 특히 중국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이 같은 현상은 서울 및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추세다. 강원도는 1998년까지만 해도 중국 유학생이 도내 전체에 10명 미만이었으나 2004년 3월 현재 강원대 34명, 강릉대 20명에 이른다. 대부분 경상계열 학과 전공을 희망하는 이들은 한국어 실력을 함께 쌓아 중국으로 돌아간 뒤 한·중 경제 교류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 2004년 11월 말 현재 제주도에 체류하는 외국인 유학생은 90명으로, 전년도 같은 시기의 60명에 비해 50% 가까이 늘어났다. 이들 90명 가운데 중국인 학생은 57명으로 전체 유학생의 63%에 달한다.
[B]정부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 가동[/B]
각 지역 대학에서 아시아권 학생들의 진출과 유치 노력이 활기를 띠면서 정부도 이 지역 유학생 유치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2001년부터 유학박람회 개최 등을 통해 지속적인 유학생 확보 정책을 펼쳐 온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11월 이른바 ‘스터디 코리아(Study Korea) 프로젝트’로 불리는 ‘외국인 유학생 유치 확대 종합방안’을 확정하면서 정책을 재정비했다. 이 프로젝트는 2010년까지 아시아권 우수 유학생을 5만 명 유치해 해외 인적자원 개발을 통한 동북아 중심국가로 도약한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이들 우수학생을 초청해 최적의 장학 조건을 제공하고 학생 유치를 위한 해외 네트워크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교육부는 온라인 유학 안내와 유학박람회를 연계한 홍보 전략을 강화하고 각 대학에서는 외국어 전용 강좌 개설, 공동 기숙사 건립 등의 지원책도 내놓았다. 이와 함께 세계 속의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해외 초·중등학교의 한국어반 설치도 지원할 예정이다. 이 같은 정책 지원을 위해 교육부를 중심으로 문화관광부·외교통상부·법무부·행정자치부가 공동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같은 정부와 대학의 노력 속에서 한국을 찾은 유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을 얻어 돌아갈까? 한국어는 물론 판소리와 태권도부터 게임 강국의 노하우까지…, 제각각의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을 배우는 외국인들을 직접 만나보았다. [RIGHT]김현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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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도쿄(東京), 한 소년이 북한에서 송신하는 난수(亂數)방송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방송 내용이야 5개 숫자로 된 암호가 고작이었지만 소년은 매일 밤 방송을 청취했다. 초등학생인 고가 사토시(古賀 聰)의 이러한 ‘수상한’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6학년 때 옆반에 재일교포 친구가 전학왔어요. 그 친구를 통해 처음 한국어를 접했는데, 이상하게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말소리가 재미있더라고요. 그냥 한국어를 듣기만 해도 좋았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한 마디씩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북한의 난수방송을 들으면서 익힌 숫자 덕분에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발음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 4학년 때. 마침 그가 다니던 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면서부터다. 졸업 후 섬유회사에 취직한 뒤로도 그의 한국어 배우기는 계속됐다.
“휴가 때마다 한국을 찾아왔어요. 한국어를 배우니 한국을 알고 싶어졌고, 한국을 알게 되니 한국이 더욱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한국어를 제대로 배워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1992년 4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던지고 그는 연세어학당에 진학했다. 직장생활 틈틈이 한국어학원에 다닌 덕분에 1∼6급으로 나뉜 연세어학당 반편성시험에서 그는 단번에 4급으로 배정됐다. 연세어학당을 수료한 뒤로도 사설 학원에 등록해 한국어 배우기를 계속했지만 한국어에 대한 갈증을 풀 수는 없었다. 그가 결국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과정을 밟기로 결심한 동기다.
한국어의 말소리, 즉 발음에 유독 관심에 많았던 그는 석사 논문으로 <김두봉의 ‘소리갈(음성학)’연구>를 썼다.
“한국어는 단어가 한 단어로 존재할 때와 문장 속에 놓여질 때 발음이 많이 달라집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개음화 같은 경우죠. 이런 경우가 한국어에서는 많아요. 그래서 한국어는 외국인에게는 참 배우기 어려운 언어지만, 그 점이 한국어의 매력이기도 하죠. 석사 과정에서 음운론과 음성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김두봉 선생은 유럽의 생리음성학 이론을 응용해 한국어를 연구한 개화기의 국어학자. 음운론에 대한 논문을 구상하던 사토시는 지도교수로부터 “김두봉 선생이 자신의 저서인 <조선말본>에 어떻게 유럽의 생리음성학 이론를 접목했는지 연구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후 그는 일본의 음성학 고서들을 이 잡듯 뒤진 끝에 그 의문을 해결하게 됐다.
2003년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교사 양성코스를 수료하기도 한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국으로 유학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외국어는 중급이나 고급 수준에서는 원어민 강사가 필요하지만 초급 수준에서는 자신의 모국어 강사한테 배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같은 외국인 입장에서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박사학위를 마치는 대로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이다. 최근 일본에서 한국어 배우기 붐이 일고, 한국어학과를 개설하는 대학도 늘고 있다는 소식이 그로서는 반가울 따름이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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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소녀가 성균관에서 <맹자>를 읽고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바바라 왈. 한국생활 3년차인 그는 이제 웬만한 한국 대학생들도 생소한 사서오경을 능수능란하게 읽어 내려간다.
고교 시절 친구들이 대부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날 때 그는 홀로 아시아로 향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동양문화에 눈을 뜬 그는 대학에서도 중국학과 일본학을 선택하게 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머릿속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독일에서 한국은 그만큼 멀고도 먼 나라였다.
“독일에서 한국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중국역사책과 일본역사책을 통해 배웠어요. 특히 일본사를 공부하면서 ‘조선통신사’에 대해 알게 됐는데, 한국이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해줬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중국·일본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이상하게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독일에서 한국을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다닌 하이델베르크대학만 해도 중국학과와 일본학과는 있었지만 한국학과는 개설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지식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뒤스부르크대학에 1년 과정의 한국어 세미나가 개설됐다는 것이었다. 주저 없이 세미나에 참가 신청을 했다. 주말마다 왕복 6시간을 통학해야 했지만 그는 신이 났다.
“방학 때 3주간 집중적으로 세미나가 열리고, 학기중에는 주말마다 세미나가 열렸어요. 10명 가량이 참석했는데, 대부분 정치나 경제를 전공하는 사람이었어요. 저에게는 유익한 기회였지요. 처음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운이 좋았던 것일까. 1년 과정이 끝나갈 무렵, 바바라는 한국 국제교육진흥원의 장학금 공고를 발견했다. 이참에 한국에 가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1년 계획으로 한국에 온 그는 그러나 성균관대 대학원에 유학과가 개설되는 바람에 다시 눌러앉게 됐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의 도교와 불교에는 관심이 많은데 유교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에요. 유학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거든요. 한·중·일 3국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만 하는 학문인데도 말이죠.”
한국에 오기 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년간 유학하기도 했던 바바라는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한국의 성균관만 한 곳이 없다고 설명한다.
“정작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유교에 대해 제대로 배울 만한 곳이 없더군요. 공산화 과정에서 유교의 학문적 맥이 끊어져 버렸죠. 성균관만큼 유학을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요.”
석사 논문으로 <루소의 동정심과 맹자의 측은지심에 대한 비교연구>를 준비하고 있다는 바바라.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박사 논문에 대한 주제 까지 들어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퇴계 이황의 이기론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어요. 수업을 듣기는 들었는데 너무 어려워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이퇴계의 ‘이(理)’와 칸트의 ‘순수이성’에 대한 비교 논문을 써 보고 싶습니다.”[RIGHT] 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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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 출신의 피터 네이트는 지난해 5월 한국 프로 게임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테란의 황제’로 불리는 임요환 선수를 2대 0으로 보기좋게 눌렀기 때문이다. 당시 머리를 긁적이던 임 선수의 모습이 아직도 게이머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그의 승리는 이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그도 한때는 무명 선수에 가까웠다. 호주 1위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쟁쟁한 한국 선수들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호주 1위’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한국에 머무르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2년 말. 한국에서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토너먼트인 월드사이버게임즈(WCG)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대회가 끝났음에도 호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외국 프로 게이머들에게 한국은 선망이 대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프로 게임리그가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선수층이 두껍다는 얘기죠. 정보기술(IT) 인프라도 잘 발달돼 있어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국의 모습에 반해 머무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초창기의 한국생활은 쉽지 않았다. 특히 언어나 음식이 맞지 않아 적응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한국음식을 처음 접했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매워 도무지 먹을 수 없었어요. 환경도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한국인이 다 됐다. 팀 동료에게도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부른다. 음식도 익숙해져 지금은 삼겹살과 김치를 가장 좋아하는 한국 토종 입맛으로 바뀌었다. 한번은 한자리에서 소주를 7병이나 마셔 팀 내에서 주당으로 소문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한국생활에서 가장 큰 보람은 세계적 선수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호주 대표로 WCG 토너먼트에 참석해 처음으로 32강에 들었다. 이 같은 성적의 배경에는 한국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01년과 2002년에도 대회에 출전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데는한국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스타크래프트 기술이 세계 최고인 한국에서 배운다는 것 자체가 바로 스파르타식 훈련인 셈이죠.”
그는 팀에서도 연습벌레로 소문이 자자하다. 감독이 “팀 내에서 가장 연습량이 많은 선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다. 그는 한국에서 배운 기량을 바탕으로 세계적 선수가 돼 호주로 돌아가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품고 있는 코리안 드림을 호주에서 멋지게 실현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다.
“사실 아직 호주의 게임시장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선수가 되는 것이 1차 목표이고, 고국에 돌아가 호주를 세계적 게임강국으로 키우는 것이 진짜 제 꿈입니다.” [RIGHT]이석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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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오룽(李小龍)의 괴성이 인상적인 영화 <용쟁호투>가 미국 전역을 휩쓸던 1973년 미국 몬태나주 미줄라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던 스티븐 캐페너는 <용쟁호투>의 매력에 휩싸였다.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던 어느 날, 그는 종영 후 스크린 자막에서 ‘코리안 가라데(Korean Karade)’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 글자 아래에는 ‘태권도(Taekwondo)’라는 글자가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리샤오룽의 대역을 맡은 사람이 태권도 유단자였는데 (영화 관계자들이) 태권도 대신 ‘코리안 가라데’로 쓴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그는 ‘코리안 가라데’, 정확히 말해 리샤오룽의 대역을 한 태권도 배우에 이끌려 당시 미줄라에 있는 몬태나주립대에 설립됐던 태권도장 문을 두드렸다. 나중에는 태권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본인이 직접 도장을 운영하려고 휴학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13년 뒤인 1987년 세계대학태권도선수권대회 전미 대표선수로 뽑혀 태권도의 고향인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그는 대회 운이 별로 없는 선수였다. 대회에서 거둔 그의 성적은 3위. 이듬해 개최된 서울올림픽에서는 부상 때문에 아예 출전권도 얻지 못한 채 그는 선수생활을 접었다. 그리고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9월, 훌쩍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혜화동에 하숙방을 잡고 한국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냥 무작정 왔어요. 한국에 이끌렸던 것이 꼭 태권도뿐만은 아니었어요. 일단 여기저기 여행해 보기로 했어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더 깊이 알고 싶었거든요.”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한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태권도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서 체육철학을 전공하면서 이름도 스티븐 대신 서태부(西跆夫)로 바꿨다. ‘태권도를 하는 서양 사나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태권도계 원로인 양진방 용인대 교수가 지어줬다. 그의 졸업논문 주제도 ‘태권도철학의 본질’이었다. 그가 논문으로 쓴 태권도정신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태권도는 과정지향주의 무술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지요. 한 사람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면 신체의 한계는 금방 알 수 있지만 정신의 한계는 그 끝을 알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과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태권도를 도(道)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신의 ‘전공’에 대한 질문에 그는 막힘없이 40여 분 동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국에서 태권도의 정신을 배우는 그는 한편으로 세계에 태권도를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지난 2000년 <태권도, 한국의 혼(Taekwondo, The spirit of Korea)>이라는 영문 책을 출간해 태권도를 국제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미국 국가대표 선수로서는 불운했지만 적어도 태권도정신만큼은 대한민국 대표급 선수인 셈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이화여대 한국학과에서 한국을 배우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태권도 때문만은 아니에요. 한국생활 17년 동안 현대 단편소설부터 한국인의 성 의식, 술 문화 등 어떤 주제든 이 정도 얘기는 할 수 있는 수준이 됐으니까요.” [RIGHT]김현 기자[/RIGHT]
[SET_IMAGE]8,original,center[/SET_IMAGE]헤더 윌로비는 분명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그럼에도 웬만한 한국사람보다 판소리를 잘한다. 지난해 12월28일 서울 정동극장의 예술단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전문 소리꾼들도 소화하기 힘들다는 <춘향가> 중 ‘갈까부다’ 대목과 ‘방자 분부 듣잡고’ 대목 등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1986년 선교를 위해 한국에 처음 왔다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무한의 에너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이때 판소리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미국 유타주에 위치한 브리검영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귀국 후 곧바로 전공을 음악교육학으로 바꾸었다.
“세상에 판소리만한 음악은 없는 것 같습니다. 판소리는 수많은 등장인물을 혼자 소화합니다. 등장인물의 대사뿐 아니라 감정까지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하고요. 서양의 오페라와는 차원이 다른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졸업 후 3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도 그는 판소리에 대한 기억에 매달렸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매력에 이끌려 그는 결국 교사생활을 접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1994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민족음악학’(Ethnomu- sicology)을 공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미국에서 판소리에 대한 갈증을 풀기란 쉽지 않았다. 1997년 그는 결국 태평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1년, 그는 전국을 돌며 소문난 소리꾼들을 찾아다녔다.
“1주일에 한 번씩 국립국악원 이주은 선생에게 판소리를 전수받는 가운데 지역의 유명한 소리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요청했어요. 그때서야 지역에 따라 판소리가 다르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됐고요.”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국립극장을 찾아 동료들과 어울려 판소리를 연습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해 국립극장에서 단독공연을 열게 될 만큼 판소리와 빠르게 가까워졌다.
“지인들이 가끔 저에게 왜 판소리를 배우느냐고 묻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판소리에는 영어로 표현하기 힘든 ‘한(恨)’이 서려 있다고 설명하지요.”
윌로비는 지난해 9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교수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도 그는 못다한 한국문화 배우기에 골몰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이 마련한 외국인국악학교에 입학해 민요나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에는 ‘또랑깡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다섯 마당을 부르는 소리꾼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대중을 위해 노래부릅니다. 서민의 문화이자 한국의 참모습인 셈이죠. 앞으로는 서민의 한이 서린 분야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RIGHT]이석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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