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외교통상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촉망받던 외교관이 사표를 던지고 농림부로 자리를 옮겨 관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현재 농림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아젠다(DDA: 2001년 11월14일, 카타르 도하 각료회의에서 합의된 WTO 제4차 다자간 무역협상) 협상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이충원(李忠元) 사무관.
[SET_IMAGE]1,original,left[/SET_IMAGE]지난 8월25일, 8년간 걸어왔던 외교관의 길을 접고 농림부행을 택한 이 사무관의 선택에 대해 가까운 지인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간 뒤 농림부 내에서 뿐 아니라 네티즌들은 그의 ‘숭고한 퇴직’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농림부 홈페이지와 각종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는 ‘어려움을 겪는 농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 ‘이씨 소식은 많은 농민에게 힘이 될 것 같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씨의 선택은 성공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개인의 입신양명에 급급해 하지 말고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참 공무원이 돼 달라’는 등 격려의 글이 쇄도한 것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도 이 사무관은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는 “농림부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걸려오는 전화와 취재 요청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못 볼 지경이어서 민망하다”고 말했다.
이 사무관은 지난 1996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졸업과 동시에 23세의 나이로 외무고시(30회)에 합격했다. 이 사무관은 그 후 외교안보연구원의 연수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고 외교통상부에 부임한 뒤에도 업무 능력에서 자타의 공인을 받아왔다.
북미국에서 주한미군, 한미행정협정(SOFA) 등 한·미 안보동맹 업무, 국제경제국에서 양자간 경제·통상 협정 협상,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업무, 통상교섭본부에서 한·미 투자협정(BIT) 업무 등 외교부 내 핵심 업무를 맡았던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 서기관(4급) 승진이 예정된 터였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외교통상부에서 농림부로의 ‘전업’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B]“농민에 도움주는 협상 하고 싶어”[/B]
그의 결정에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농사를 지었던 선친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으로 현재 농림부 산하 농촌진흥청에서 연구사로 일하는 부인 문지혜 씨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농림부행의 결정적 동인은 그의 오랜 꿈 때문이었다.
“외교부에서 통상업무를 하면서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농업협상을 하고 싶었어요. 더구나 농업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그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농업은 죽은 산업이 아니라 그야말로 휴먼 첨단 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재학 시절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과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 농업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고 외교관의 길을 택했다가 뒤늦게 본래의 꿈을 찾은 것이다.
그는 외교부에서 수년간 통상업무를 담당하면서 국내외의 농업 동향을 파악하게 됐고, 우리 농업과 농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농림부에서 새 업무에 둘러싸인 그는 다가올 DDA 협상과 관련해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DDA 협상은 향후 우리 농업과 농촌의 장래에 중대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공직자로서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국가적 중대사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외교부에서 경험한 통상 전문성을 살려 DDA 협상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B]|"편한 길보다 중요한 길 개척하고 싶었다"|[/B]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외교통상부의 한 외무관이 “힘들 때 동료들과 함께 하겠다”며 채용 통보를 받은 대학교수의 길을 포기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약국 국제법규과 김선표(金宣杓) 외무관. 그는 최근 고려대 국제법 교수로 채용됐다는 최종통보를 받고도 고민 끝에 외교부 잔류를 선택했다.
“지난해 말부터 외교부 안팎에서 벌어진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외교부의 위신이 크게 손상되면서 동료들의 사기가 많이 꺾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저 혼자 편한 길을 가겠다고 외교부의 문을 나설 수 없더군요.”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오랫동안 교수직을 꿈꿔 최근 이 대학의 국제법 교수 공개모집에 응모했던 그였기에 주위에서도 그의 결정을 의아해 했다. 1991년 외무고시에 수석 합격해 외교부에 들어온 그는 재직중 영국 에든버러대에 유학해 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해 외교부 내에서는 국제법 분야의 재목으로 손꼽혔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김 외무관은 “모교이기 때문에 갈등이 더 컸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외무관과의 일문일답.
[B]“6자회담 관련 국제법 검토 보람”[/B]
-좋은 기회이자 소망하던 꿈인 교수직을 버리고 외교부에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새 틀에 박힌 사고에 익숙해진 채 일하기보다 대학에서 자유로운 사고로 연구활동도 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교수로 채용됐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외교부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직자로서 외교부에서 할 일이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
"주변의 반대보다 본의 아니게 이번 결정으로 모교 법대 교수님들께 누를 끼친 것이 아닌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현재 외교부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무엇인가.
"주로 해양법, 남북 관련 국제법, 6자회담 관련 국제법 문제 등 우리나라가 관련된 국제법 현안들을 다루고 있다. 국제법규과에서 작성한 검토의견은 주로 외교부 내 다른 부서로 전달돼 활용되고 있다. 밖에서 볼 때는 눈에 띄지 않지만 이런 의견 제공이 크고 작은 정책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직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보람있었거나 힘들고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나?
"1997년 일본이 일방적으로 직선기선을 적용해 우리 어선을 나포하려고 했을 때 그 법적 부당성을 미리 검토해 대비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6자회담 관련 국제법을 검토한 것도 보람있는 일이었다. 반면 1998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당시 최선을 다해 협상 안을 만들고 일본과의 교섭에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비판 여론을 맞은 점이 감내하기 힘들었다.”
-앞으로 외교관으로서 어떤 길을 가고 싶나?
"이 길을 계속 가겠다고 선택한 이상 껍데기가 아닌 뭔가 쌓여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지난해 네덜란드에서 해양법을 주제로 영문 단행본을 출간했는데, 다른 분야 글도 써보고 싶다. 또 기회가 닿는다면 유엔 등 국제기구나 국제사법기구에서 근무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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