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center[/SET_IMAGE]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멀리-. 인간의 한계에 대한 묵묵한 도전의 역사는 아름답고도 감동적이다.
그들이 걸어온 훈련의 여정은 어떤 픽션보다 드라마틱하다. 승리의 이면에는 예외없이 땀과 눈물과 열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광의 월계관을 쓰는 순간, 그 승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를 열광시킨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의 민족임에야.
지난 한여름 밤 온 국민을 잠 못 이루게 한 영광의 얼굴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U][B]<황금빛 발차기로 불운 날린 ‘태권V’>[/B][/U]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B]태권도 남자 80kg이상급 금메달 문대성[/B]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지막 날, 한국 대표팀은 초조했다. 당초 목표했던 메달 순위 10위권에 들기 위해서는 금메달 한 개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의 불씨를 살린 것은 태권도 남자 80kg이상급 결승전에 오른 문대성(28·삼성에스원) 선수였다. 그의 상대는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 객관적 전력은 문 선수가 한 수 위였지만 홈경기의 이점을 감안하면 결코 낙관만 할 수는 없었다.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니콜라이디스는 경기 초반부터 거칠게 달려들었다. 문 선수가 먼저 오른발차기로 1점을 획득했다. 다급해진 니콜라이디스가 문 선수의 안면을 강타하려는 순간, 문 선수의 왼발이 허공을 갈랐다. 바닥에 고꾸라진 니콜라이디스는 머리를 매트에 박았다. 경기 시작 2분10초 만에 문 선수가 KO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B]“비운의 스타라는 말 정말 싫었거든요”[/B]
온 국민에게 마지막 환호성을 지르게 한 문대성. 그러나 그에게는 아테네올림픽 이전까지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 잃고 문 선수는 그를 지탱해 준 태권도라는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한동안 술과 벗했다.
“그때 붙여진 비운의 스타라는 말이 정말 싫더군요. 정말 운이 없는 사람 같잖아요? 그 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죠.”
방황 끝에 문 선수가 선택한 것은 군 입대. 2001년 8월 상무부대에 입대한 그는 황영갑 감독의 지도 아래 다시 매트로 복귀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며 재기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관심은 아테네로 향하고 있었다. 손목뼈가 2개나 부러진 몸 상태로도 지난 4월 열린 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며 한풀이(?)에 나섰다.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세 가지 기도를 드렸어요. 첫째는 우리나라가 10위권에 드는 것, 둘째는 제 경기가 마지막날이어서 저를 10위권 달성의 도구로 써달라는 것, 마지막은 멋진 한판 승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기도의 결과에 저도 놀랐어요.”
지금은 190cm, 92kg의 헤비급이지만 어린 시절 문 선수는 약골 중의 약골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몸이나 단련하라’며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의 등을 떼밀어 태권도를 배우게 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태권도장 관장의 권유로 그는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걸었다.
“공부도 별로고, 달리 할 것도 없었다”고 겸손해 하는 그지만, 사실 그는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현재 국민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다. 한동안 주말 과외를 받아가며 영어를 열심히 습득하기도 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운동을 계속할지 감독님과 의논해야겠지만, 기량이 좋은 후배들이 많은 만큼 탁구의 김택수 코치처럼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며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U][B]<눈물의 승리 일군 ‘실업자’ 지도자 >[/B][/U]
[SET_IMAGE]3,original,center[/SET_IMAGE][B]금빛 은메달 여자 핸드볼팀 감독 임영철[/B]
2004년 아테네올림픽 마지막날 벌어진 여자 핸드볼 결승전. 127분 동안이나 온 국민의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했던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영원한 맞수 덴마크를 맞아 결국 패배했다. 두 차례의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던지기에서 눈물을 삼킨 것이다. 아테네올림픽 최고의 감동 드라마로 꼽을 만한 명승부를 지켜본 많은 국민은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에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생각일 뿐이었다. 대표팀 임영철(44) 감독은 “다이아몬드보다 값진 메달이라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목에 건 금메달을 똑 떨어뜨린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B]“이제는 국내에서 명문팀 만들 겁니다”[/B]
실업팀이 5개뿐인 한국 대표팀이 프로 1부리그 16팀, 2부리그 40팀을 운영하는 덴마크와 그같은 경기를 펼칠 수 있는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더구나 올림픽에 출전한 대표팀 선수 가운데 4명이 소속 없는 ‘무적’(無籍) 선수들. 지난해 여자 실업팀 2개팀이 해체된 탓에 국내 여자 핸드볼은 고사 위기에 몰려 있었다. 임 감독은 이러한 핸드볼 불모지에서 꽃을 피운 마술사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결승전이 끝난 뒤 임 감독은 “선수들이 기량이 부족해서 진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핸드볼을 지원한 덴마크에 밀려 졌다”며 울먹였다. 뼈있는 이 말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고 말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잇따라 금메달을 따며 ‘효자 종목’으로 떠오른 여자 핸드볼은 그 후 내리 3회나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꼭 메달을 따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죠.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테네로 가기 전 8개월 동안은 여자 핸드볼팀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훈련 후 탈진해 앰뷸런스에 실려 나가는 선수들이 나올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 계속됐다.
“훈련 중간 중간에 저도 솔직히 ‘이렇게 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올림픽이 끝나면 돌아갈 팀도 없는 애들에게 괜한 고생만 시키는 것은 아닐까, 줄곧 마음고생을 했거든요.”
사정은 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몸담았던 종근당 여자 핸드볼팀이 지난 1995년 해체된 이래 줄곧 야인생활을 해온 그는 다행히 올림픽 개막을 한 달여 앞두고 창단된 효명건설 핸드볼팀 감독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임 감독은 “일간지 1면에 저희 팀이 난 것을 보고 정말 우리가 큰일을 해냈구나 하고 느꼈다”며 “이제는 신생 효명건설을 명문팀으로 만드는 것이 새로운 목표”라고 말했다.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을 지켜본 유럽 프로팀에서 잇따라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은퇴 선수까지 불러 신생팀을 만든 내가 어떻게 한국을 떠나겠느냐”며 여자 핸드볼 중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U][B]<그리스 신들도 놀란 神弓>[/B][/U]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B]여자 양궁 2관왕 박성현[/B]
마지막 한 발이 남았다. 점수는 231-240. 이 화살이 8점에 꽂히면 역전패, 9점이면 연장전, 10점이면 우승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박성현(21·전북도청)은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한 후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침묵 속의 경기장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12cm의 노란색 과녁 정중앙을 꿰뚫은 것이다. 241-240. 중국 선수들은 넋을 잃었다. 1점 차로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요? 자세가 좋은지 그 생각만 했죠. 화면을 보고 나서야 10점을 맞혔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자 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우승하면서 2관왕에 오른 박성현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클럽 활동으로 걸스카우트에 들려고 했지만 자리가 없어 선택했던 양궁부. 양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그 후 양궁은 그의 운명이 돼버렸다.
[B]“올림픽에 나간 것도 운이 좋았는걸요” [/B]
170cm에 72kg의 좋은 신체조건을 가진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해 최고의 궁사로 다듬어낸 사람은 전북도청 감독이자 아테네 올림픽 여자 양궁 대표팀을 이끌었던 서오석 감독. 서 감독은 전북체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성현 선수를 보자마자 큰 재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신체조건도 좋았지만, 활을 쏠 때 순발력이 있었어요. 자세를 조금만 교정하면 대성할 수 있는 선수라고 여겼죠.”
전북도청으로 스카우트한 뒤 서 감독은 박성현에게 그동안 써오던 66.2인치짜리 활 대신 70인치짜리 활을 쥐여주었다. 국내 여자 선수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활을 바꾼 뒤 박 선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고교를 갓 졸업한 2001년 3월 종별선수권대회에서 그는 종합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국가대표선발전을 1위로 통과한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코리아국제양궁대회 개인 3위, 단체 1위에 오르면서 스타 대열에 올라섰다.
이 무렵부터 박 선수는 동갑내기로 이미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2관왕을 차지한 윤미진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태릉선수촌에서 연습할 때나 국내대회에서는 세계 1위를 하는 그였지만 국제대회에서는 늘 윤미진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 박성현에게 ‘국내 1인자, 국제 2인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2인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지금 제가 세계 1위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국내 선수들 중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너무 많거든요. 다들 종이 한 장 차이여서 올림픽에 나간 것조차 행운으로 여기는 걸요.”
아테네올림픽 2관왕으로 세계인들로부터 ‘신궁’의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듣는 그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U][B]<겸손을 가르친 녹색 테이블의 마술사>[/B][/U]
[SET_IMAGE]5,original,left[/SET_IMAGE][B]13억 중국인을 울린 탁구신동 유승민[/B]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탁구에서 올림픽 3회 연속 전관왕을 노렸던 중국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금메달을 획득한 유승민(22·삼성생명). 귀국 후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과 각종 행사 참가로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지만 그는 그것이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탁구를 홍보할 수 있겠느냐”며 빙그레 웃는다.
영국의 로이터통신이 탁구 남자단식 결승전을 올림픽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것에 대해서도 “왕하오와의 결승전은 제가 봐도 재미있더군요. 제 인생 최고의 경기였어요”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불과 2개월 전만 해도 유승민에게 올림픽 금메달은 신기루였다. ‘만리장성’의 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선수 3명 가운데 만만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금메달 희생양이었던 중국의 차세대 에이스 왕하오와는 역대 전적에서 무려 6전 전패. 절대 열세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메달 목표가 없었을까.
“당연히 금메달을 보고 출전했죠.(웃음) 그 목표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겼겠어요?”
왕하오와의 결승전은 80% 이상이 기싸움이었고 심리전이었다.
“테이블 너머로 왕하오 선수가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어요. 경기를 하면서 차츰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B]“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죠”[/B]
18세의 나이로 출전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너무 긴장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던지라 그는 아테네올림픽만큼은 “질 때 지더라도 멋있는 경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여섯 살 때 라켓을 처음 잡은 유승민 선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국 무대를 휩쓴 탁구신동. 중학교 3학년 때인 열다섯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교 1학년 때인 1998년, 그는 국내대회에서 처음으로 김택수 선수를 3-0으로 꺾어 탁구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국제대회에서 기를 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3차례나 나섰으나 모두 64강 관문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스스로 아테네올림픽 티켓을 반납하고 코치로 나선 김택수 선수의 집중 조련을 받으며 그의 기량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국 선수들의 변칙적인 이면 타법(라켓의 양면을 활용하는 타법)을 극복하기 위해 볼을 하루에 3,000개씩 쳤을 정도로 훈련에 몰두했다. 김택수 코치는 스스로 이면 타법을 구사하면서 그의 연습 파트너가 돼 주었다.
그는 10월20일부터 중국 쓰촨(四川)성 탁구단에 임대돼 11월9일까지 중국 슈퍼리그에서 뛸 예정이다.
“중국측에서 먼저 제안했는데, 가깝게는 2005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멀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대비해 가기로 결정했어요. 중국탁구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거든요.”
호랑이를 잡으러 직접 호랑이 굴로 들어가겠다는 심산이다. 미완의 탁구신동에서 명실상부한 ‘탁구황제’로 올라선 그이지만 아직 배가 고프다.
[U][B]<0.1초의 기술 선보인 한판승의 사나이>[/B][/U]
[SET_IMAGE]6,original,left[/SET_IMAGE][B]유도 남자 73kg급 금메달 이원희[/B]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한판승의 마술사 이원희(23·한국마사회).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이원희를 가리켜 ‘여러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원희의 모습을 놓칠지 모른다. 아무도 그를 상대로 5분을 다 버틸 수 없다’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원희는 올림픽 5경기 가운데 4경기를 한판승으로 끝냈다. 지난해 그가 세계선수권대회를 포함해 국내외 8개 대회를 잇따라 휩쓸며 48연승을 질주할 때 한판승을 거둔 횟수는 무려 43회에 달했다. 그는 이런 별명에 흡족한 표정이다.
“굉장히 기분 좋죠. 유도에서 최고라고 인정해 주는 말이잖아요?”
올림픽 이전부터 이원희는 세계유도연맹(IJF)이 꼽은 우승후보 ‘0순위’였다. 그만큼 그는 중압감도 느꼈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체중이 빠져 걱정했는데, 잠을 못 자니까 체중이 더 빠지더군요. 아테네에 가서도 결승전 전날까지 긴장 때문에 잠을 설쳤어요.”
결승에서 이긴 뒤 관중석으로 뛰어오른 ‘특별한’ 세리머니도 사실은 잠이 안 와 침대에서 뒤척이다 생각해낸 것이다.
승부 근성이 강한 선수로 정평난 이원희는 어려서부터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친구가 다른 학교에서 맞고 오면 다음날 친구 손을 이끌고 그 학교로 쫓아갔을 정도. 당연히 학교 안팎에서 그는 싸움꾼으로 통했다. 이런 아들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아버지가 그를 유도장으로 이끌고 갔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후 이원희는 보성중·보성고를 거쳐 용인대에 입학하는 등 유도 엘리트 코스를 차곡차곡 밟았다.
[B] “사랑하면 냉정함이 흔들리더라고요!”[/B]
그러나 이원희는 2002년 말까지도 무명에 가까웠다. 최용신이라는 선배선수에 가린 탓이었다. 천재일우,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지난해 2월. 유럽투어를 앞둔 최용신이 갑자기 배탈이 나 대타로 나서면서다. 지난해 헝가리 오픈을 시작으로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아시아선수권, 오사카 세계선수권, 올 초 모스크바 오픈까지 그는 연승 행진을 달리며 세계 유도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공식 인터뷰에서 “사랑하게 되면 냉정함이 사라질 것 같아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고 있다”고 말해 외신기자들을 웃겼던 이원희 선수. 그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까지만 해도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운동에 집중하려고 사랑을 포기했을 정도로 악바리다.
“2년 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것이 1차 목표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2008년 베이징에서 올림픽 2연패의 대기록을 세워 보고 싶어요. 세계 유도사에 남을 기록을 만들고 싶어요.”
[U][B]<체조선수 출신 ‘막내 레슬러’>[/B][/U]
[SET_IMAGE]7,original,right[/SET_IMAGE][B]레슬링 남자 금메달리스트 정지현[/B]
레슬링 남자 60Kg급 금메달리스트 정지현 (21·한국체대) 선수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의 최고 ‘깜짝스타’로 꼽힌다. 침팬지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빤찌’인 정지현은 벌써 스타 부재에 시달리던 국내 레슬링계를 짊어지고 나갈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섰다.
그의 나이 21세.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심권호 해설위원은 ‘올림픽 3연패도 가능한 선수’로 그를 치켜세운다.
정지현은 올림픽 후 더 바빠졌다. 인기만큼 그를 찾는 곳이 많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도 그는 웬만하면 모두 응한다. 자신으로 인해 레슬링이 더욱 국민에게 사랑받는 스포츠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B]“심권호형 2연패 기록 깰 거예요”[/B]
정 선수는 타고난 만능 스포츠맨이다. 석수초등학교 5학년 때 체조선수로 처음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의 체조선수 활동으로 그는 유연성을 키웠다. 유난히 힘과 근성이 좋은 그에게 주변에서 유도를 권했다.
6학년 때 하얀 유도복을 입고 순발력을 길렀다. 그러나 키가 너무 작았다. 그런 그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이 레슬링이었다. 불광중 3학년 무렵이었다. 작은 키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오히려 키에 비해 유난히 긴 팔 때문에 그는 훨씬 유리한 신체 조건을 가진 셈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내가 할 운동은 바로 레슬링이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항상 밝고 쾌활하고 낙천적인 정 선수의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 그의 어머니 서명숙(49) 씨는 방송 인터뷰를 통해 막내아들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서슴없이 진솔하게 쏟아내며 덩달아 스타가 됐다.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제일 먼저 한국에 있는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의 첫 마디가 ‘아이고 우리 막내둥이 참 잘했다. 아픈 데는 없냐? 밥은 잘 먹었고’였어요. 늘 먹는 걱정만 하세요. 제가 체중감량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거든요. 항상 하는 말씀이 ‘든든한 국물 잘 챙겨먹고 힘내라’라는 것입니다.”
막내답게 그는 아직도 ‘엄마’ 타령이다. 금메달을 살짝 깨물어보는 그의 장난기 어린 행동에는 여전히 천진스러움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를 마냥 순둥이로만 봤다가는 이번 올림픽에서 내로라 하는 세계 스타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큰코다치기 십상일 듯싶다.
“올림픽에 나가기 전에 언론에서 (김)인섭이형이나 (임)대원이형, (문)의제형들만 취재하는 거예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저도 금메달을 딸 수 있는데라고 말이죠.”
언뜻언뜻 느껴지는 악바리 같은 승부근성이 역시 올림픽 챔피언답다. 정지현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선 그는 선배 심권호의 위업을 똑같이 밟겠다는 목표를 말한다. 레슬링계에서는 입문 6년 만인 21살의 어린 나이로 세계를 제패한 그의 성장 속도와 타고난 자질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2008년에 25살, 2012년에 29살.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 순간들은 그의 최고 전성기가 될 것이다.
[U][B]<기록 경신 매력에 빠져든 처녀 역사>[/B][/U]
[SET_IMAGE]8,original,left[/SET_IMAGE][B]여자 역도 은메달리스트 장미란[/B]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괴력의 처녀 역사, 장미란의 미소는 해맑았다. 수백kg의 바벨을 들어올린 강한 근육을 헐렁한 사복 속에 감춘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올림픽 후 소원했던 탤런트 권상우 ‘오빠’와의 깜짝 데이트를 즐긴 기쁨 뒤라서인가!
“별명이 피오나 공주(만화영화 ‘슈렉’의 여주인공)라면서요?”
“아이, 그 별명 싫어요.”
눈을 흘기는 그에게 다시 ‘좋아하는 별명’을 묻자 ‘신기록 제조기’라며 까르르 웃는다. 역도에 입문한 대부분의 여자 선수처럼 장미란도 처음에는 역도가 싫었다. 역도 선수의 이력을 가진 부친(장호철)의 역도 사랑은 장녀인 그에게 무거운 바벨을 들려주었다. 평소 ‘영원한 역도인’을 자처하던 부친은 여중 3년인 장미란을 역도팀이 있는 원주시청으로 이끌고 갔다. 평소 알고 지내던 김해광 감독에게 자신의 딸을 보여주기 위한 것. 김 감독은 “가능성이 있는지 봐달라고 오셨는데 첫눈에 미란이에게 역도를 가르치고 싶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B]“신기록 제조기로 불러주세요”[/B]
165cm, 78kg의 체격도 그랬지만 소녀 장미란은 아버지를 닮아 순발력까지 갖췄다. 하지만 부친의 ‘욕심’과 달리 꿈 많은 중3 소녀가 역도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체육관을 뛰쳐나가며 반항해 보았지만 아버지의 결심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이현자)에게 통사정해 보기도 하고, 밥을 굶어 가면서 저항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장미란의 방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9년 고등학교(원주공고)에 진학하면서 바벨을 움켜잡은 그의 손에도 힘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눈은 예리했다. 바벨을 잡기 시작하자 그의 기량은 일취월장한 것이다.
바벨을 잡기가 무섭게 그는 전국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4월에는 드디어 전국춘계여자대회에서 정상에 올랐고, 그 뒤 5년째 단 한 차례도 정상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역도처럼 정직한 운동이 없더라고요. 열심히 한 만큼 어김없이 기록으로 나타나거든요. 그 뒤로는 기록을 경신하는 재미에 빠져 버렸어요.”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는 장미란의 메달에도 판정 시비가 일었다. 중국의 탕궁훙 선수가 용상 마지막 도전에서 182.5kg을 들어올리며 대역전극을 벌였지만, 정지 동작에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
“솔직히 저도 금메달이 확정적인 줄 알았기 때문에 아쉬운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탕궁훙이 최선을 다해 바벨을 들어올리는 모습에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역도란 그런 것이거든요. 자신과의 끈질긴 싸움이거든요.”
“언제까지 역도를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바벨을 들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라고 답했다.
장미란의 머릿속에는 벌써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홈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나설 탕궁훙에게 멋진 설욕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시민들의 격려를 뒤로한 채 그는 다시 태릉선수촌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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