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첫 로잔 콩쿠르 우승 발레리노 박윤재
“참가번호 214번, 윤재 박!”
2월 8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5대 발레 콩쿠르 ‘제53회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 42개국 445명이 참가한 대회의 우승자로 호명된 이름은 열여섯 살의 박윤재 군(서울예술고등학교 재학)이었다. 한국인 발레리노로는 최초다. 특별상 격인 ‘최우수 인재상’도 박 군에게 돌아갔다.
로잔 콩쿠르는 열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참가할 수 있는 전 세계 발레 꿈나무들의 등용문이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1985년 한국인 최초로 이 대회에서 우승해 해외에 진출했다. 박 군은 결선에서 고전 발레 ‘파리의 불꽃’과 컨템포러리 발레 ‘레인’을 선보였다. 스스로 강점이라 꼽는 유연성과 회전력, 음악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참가자들은 경연 무대 외에도 일주일간 합숙하면서 기본동작을 배우고 연습한다. 이 기간 참가자들의 태도도 심사에 반영된다. 입상자 9명에게는 장학금과 해외 발레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박 군이 가장 먼저 학교를 선택하고 그후 입상 순위별로 학교를 지명한다.
박 군은 다섯 살에 누나를 따라간 발레학원에서 발레를 처음 알았다.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운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라고 하니 6년 만에 ‘한국 발레리노 최초 로잔 콩쿠르 우승’이라는 수식어를 단 셈이다. 박 군에게 로잔 콩쿠르는 기량을 입증한 무대 이상의 의미였다. 콤플렉스라고 여겼던 두꺼운 다리가 개성으로 평가받는 경험을 통해 발레리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색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승 이후 한 달여 만인 3월 중순, 인터뷰를 위해 박 군과 마주 앉았다. 그가 발레 연습을 마친 직후였다. 토슈즈를 벗자 새끼발톱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손으로 핏방울을 쓰윽 닦아내고는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치토스 발’이라는 애칭을 소개했다. 오랜 연습 탓에 발 여기저기 관절이 튀어나와 울퉁불퉁한 모습이었다.

1위로 호명되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흘렸어요.
처음에는 ‘진짜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제 번호와 이름이 들리니까 상을 받으러 나가긴 하는데 ‘제대로 들었나? 나가도 되나?’ 싶었어요. 대회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정말 많아요. 특히 지난해에는 힘들었던 일들이 겹쳤는데 그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보상받는 기분이었어요.
어떤 점이 유난히 힘들었나요?
체력적인 어려움은 버티면 되는데 정신적으로 힘드니까 앞으로 어떻게 발레를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깊었어요. 실은 저한테 로잔 콩쿠르는 발레를 관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보는 도전이었어요. 부모님은 당장 그만둬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제가 출전을 고집했어요. ‘실패하면 깔끔하게 발레를 그만두자. 안되면 안되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나가서인지 오히려 부담감이 없더라고요. 덕분에 우승까지 할 수 있었고 발레를 대하는 마음가짐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어요.
예를 들면요?
전에는 잘되지 않는 동작이 생기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서 배가 아파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였어요. 로잔 콩쿠르에 다녀온 뒤론 같은 상황이 생겨도 ‘천천히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마음먹게 돼요. 로잔 콩쿠르는 어릴 때부터 꿈에 그려온 무대였어요. 대회라는 개념보단 무대로 바라보니 그 자체로 너무 행복해서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번 대회에서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왜 발레를 하는지, 왜 발레를 좋아하는지’를 깨달은 거예요.
깨달음의 내용이 궁금한데요.
무대에서 관심받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웃음). 제 춤을 보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요. 저는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인데 발레 무대나 영상을 보면 생각이 싹 비워져요. 마찬가지로 관객이 제 춤을 통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로잔 콩쿠르 측에서 공개한 연습 영상을 보니 키(185㎝)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큰 편이더라고요.
연습 때 열다섯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는 A그룹, 열일곱 살부터 열여덟 살까진 B그룹으로 나뉘어요. 경연은 다 같이하는 거라 그룹이 큰 의미는 없지만 A그룹에서 제가 가장 컸던 것 같아요.
발레리노에게 유리한 신체조건이 있나요?
제일 좋은 건 긴 팔다리, 그다음은 작은 얼굴과 긴 목이에요. 이런 조건을 갖춘 경우 대부분 키가 큰데 장신 발레리노는 점프하거나 턴을 할 때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요. 보여지는 부분이 큰 무용이다 보니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테크닉보단 저만의 색을 지닌 춤을 연구해요. 제가 전하고 싶은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닿아서 감동시킬 수 있는 춤이요.

사실 박 군에게는 신체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키가 작아 보이는 것도, 조금만 살이 붙어도 둔해 보이는 것도 모두 두꺼운 허벅지 때문인 듯했다. 허벅지 근육을 없애 가늘어 보이려고 폼롤러로 허벅지를 밀다가 피멍까지 들었다. 그러나 정작 로잔 콩쿠르에선 다리에 대한 칭찬이 많았다. 단단한 근육이 중심을 잡아 점프도 회전도 안정적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발레리노로서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온 순간이었다. 박 군은 비로소 자신만의 색을 표현할 줄 아는 발레리노를 꿈꾸기 시작했다. 배역에 얽매이지 않는 나만의 춤을 출 수 있게 된 것이다.
평발이라면서요. 발바닥을 써야 하는 동작들도 많을 텐데요.
더 어릴 때는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어요. 중학생이 된 뒤로 그런 느낌은 줄어들었는데 쥐가 자주 나요.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플 때도 있어요. 그래도 그냥 동작을 해요. 쥐가 나서 발가락이 안 펴지면 바닥에 발가락을 누르면서 해요. 예전에는 ‘내 발은 왜 이 모양일까’ 화나고 슬펐는데 요즘엔 ‘이 고통도 지나가겠지’ 생각해요. 쥐가 난다고 동작을 포기하면 나아질 수 없잖아요.
평소 연습을 얼마나 해요?
많이 할 때는 매일 열두 시간씩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스케줄이 기억나요. 아침 8시에 학교 수업 받고 오후 2시까지 공연 연습하고 이동해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식사를 거르고 연습만 했어요. 잘하고 싶어서요. 저는 재능 반, 노력 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발레를 하느라 그 나이대만 누릴 수 있는 일상을 포기해야 했을 텐데요.
너무 많은데 하나만 꼽자면 발레를 시작한 뒤로는 현장체험학습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면 저는 잘 모르니까 속상하더라고요. 그래도 발레 연습하기에 바빠 금방 잊었어요. 발레 이외에 관심사라고 하면 그나마 노래 듣기예요.
원동력이 뭔가요?
욕심이 많아요. 스스로 못하는 것도, 친구들에게 뒤처지는 것도 싫어요. 친구, 형, 누나들을 보면서 ‘나도 해봐야지’ 하던 게 반복되면서 원동력이 됐어요. 또 하나, 엄마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에요. 엄마가 저 때문에 몸이 성한 데가 없어요. 저를 매일 차로 이동시키고 차 안에서 대기하느라 허리 상태가 안 좋아요. 공연 시즌에는 아침 6시에 나와서 밤 12시까지 차에만 계실 때도 있어요. 그런 부모님을 위해 더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언제 쉬어요?
많이 쉬어요(웃음). 달릴 땐 제대로 달리고 쉴 때도 제대로 쉬려고 해요. 일 년에 한 번 부모님과 긴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요.
먼저 발레를 시작한 누나와의 교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보통의 남매처럼 눈만 마주치면 싸우지만 누나는 제 무대만 보면 울어요. 로잔 콩쿠르 현장에도 누나가 있었는데 엄청 울었대요. 제가 발레하면서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늘 저를 배려해주는 고마운 누나예요.
로잔 콩쿠르 우승 이후 무대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진 않았나요?
‘실수를 하겠어? 나를 믿자. 그리고 실수하면 어때? 나도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어요. 어떤 춤을 추더라도 저만의 색이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무용수가 되고 싶어요. 춤에 정답이 없다곤 하지만 정답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용수가 가진 매력, 해석력, 표현력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아요.
어떤 발레리노가 되고 싶어요?
아프지 않고 오래 춤추고 싶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무용수가 되고 싶고요.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