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최초 ‘카라얀상’ 수상 윤한결 지휘자
겨우 세 살이었다. 아이는 LP판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이 흘러나오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웅장한 음악 소리 때문인지 한동안 벌벌 떨던 아이는 음악이 4악장에 이르자 갑자기 피아노로 향했다. 아이는 교향악단의 호른 연주를 따라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미레도솔, 미레도솔.” 여러 차례 정확하게 호른의 음을 따라했다. 절대음감이었다. 부모는 아이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다. 피아노 교사는 아이의 재능을 눈치채고 작곡 공부를 권했다.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리고 당연한 듯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예술고등학교를 1년 다니고 자퇴한 후 독일로 건너가 뮌헨음악대학에서 작곡과 지휘, 피아노를 전공했다. 2023년 한국 최초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을 수상한 윤한결이다. 54개국 323명이 출전한 가운데 이룬 쾌거였다. 그가 운명처럼 카라얀을 만난 후 26년 만의 일이다.
카라얀상은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이름을 딴 국제 콩쿠르로 ‘스타 지휘자들의 등용문’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버밍엄 심포니 수석 객원지휘자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 네덜란드 국립오페라 상임지휘자 로렌조 비오티 등도 이 대회 우승자 출신이다. 심사위원단은 윤한결을 우승자로 꼽으며 “카리스마 있고 준비가 철저히 돼 있으며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오는 8월 초 세계 4대 클래식 음악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윤한결은 자신이 직접 작곡한 음악으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진다. 카라얀상 우승자는 상금과 더불어 이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오스트리아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제 윤한결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음악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카라얀상 수상 이후 체감하는 변화가 있나?
접점이 전혀 없고 연락이 닿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악단들과 연락이 오가는 것, 정기연주회를 지휘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지난 2월 다니엘레 가티가 상임으로 있는 피렌체 마지오 무지칼레에서 정기연주회 데뷔를 했고, 3월에는 장 에프랑 바부제와 함께 국립심포니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큰 악단일수록 최소 두어 시즌 먼저 정기연주회 라인업이 준비되기 때문에 현(인터뷰하는) 시점에서 확정되지 않은 연주들이나 아쉽게 불발된 연주도 많다.
카라얀상 수상 인터뷰 중 ‘이제 원치 않게 참가해야 하는 대회는 없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답했다. 어떤 의미인가?
사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내가 참가할 마지막 대회인 것은 분명했다. 음악세계에서 ‘대회’는 큰 기회인 동시에 여러 이유로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 음악가들이 ‘제일 큰 상을 타면 대회는 그만 나가자’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내게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주최하는 카라얀상이 그런 존재였다. 인터뷰에서 그렇게 답했던 것은 ‘카라얀상에 초대받아서 잘해낼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안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떠올렸던 것 같다.
기악과 성악뿐 아니라 지휘 분야 세계적 콩쿠르에서도 한국인 우승자가 탄생하면서 ‘K-클래식이 글로벌 콩쿠르를 휩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또 K-클래식의 매력은 무엇일까?
한국 정서와 문화가 K-클래식의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 퀸이나 마이클 잭슨의 록음악과 팝음악을 좋아했다. 그런 음악을 듣다가 한국식 발라드를 들으면 무척이나 감정적이고 애절하며 슬픔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서린 음악’과 ‘음학이 아닌 음악’이라는 정서가 한국 음악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성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한다. 국제무대 수상 등 한국인들이 좋은 결과를 내는 데는 어릴 때부터 성적 위주의 경쟁을 겪은 점도 한몫하는 것 같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혹은 훈련받은 젊은 음악가들이 세계 대회에서 활약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남은 음악가’는 두 부류다. 큰 부담을 이겨낼 능력과 실력을 기른 사람, 부담 자체를 느끼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다. 물론 경쟁으로 인해 일찍이 음악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은 큰 부작용이겠지만.
지휘와 작곡, 피아노 연주가 모든 가능한 지휘자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지휘를 선택한 배경은 무엇인가?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긴 했지만 연습할 시간도 연습량도 적어서 프로페셔널하게 연주할 계획은 없었다. 작곡과 지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작곡에 쏟다가 동기부여가 필요해 뒤늦게 지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내게 작곡과 지휘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황에 따라 바뀐다. 지난 몇 년 간은 지휘에 집중했다.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우라와 카리스마는 무조건적인 필수 자질이다. 유연한 팔과 손목, 몸짓(테크닉)도 중요하다. 거기다 하나 더, 인품은 필수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큰 플러스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지휘자로서 본인의 강점은?
내 강점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팔이 유연하다’, ‘에너지가 있다’, ‘웃기다’,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얘기를 학창시절에 많이 듣긴 했다.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전체의 소리는 결국 지휘자의 몫이 아닌가. 단원들과의 연주적 소통을 위해 특별히 하는 것들이 있나?
다양한 호흡법, 테크닉, 표정, 어투, 분위기 등을 통해 연주자들에게 최대한 많은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
‘단원들과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지점들이 있는지?
내 지휘만을 통해 템포, 음향, 음색 등에 큰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날 때 그런 느낌을 받는다.
곡 해석을 하면서 어렵거나 힘든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나?
체계성보다 감정표현이 지배적인 작품들을 이해하거나 해석을 덧붙이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대표적으로 말러 교향곡이 그렇다. 지휘자가 지휘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고 교통정리(정확한 합주에 치중한 지휘)에 집중해야 하는 작품도 해석하기 쉽지 않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오페라들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해석의 어려움을 명확히 해결하기보다는 그런 점 또한 이해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다. 통영국제음악제 감독을 했던 알렉산더 리브라이히 교수가 해준 말이 있다. ‘내 맘에 들지 않거나 실제로 별로이거나 엉망인 작품도 최대한 멋지게 연주되도록 하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두 팔을 휘젓는 지휘 동작이 쉽진 않을 것 같다. 체력관리도 중요하겠다.
지휘가 생각보다 에너지 소비가 커서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 아쉽게도 정신적인 에너지 소비만큼 칼로리 소모는 안 되는지 살이 더욱 잘 찌는 것 같다(웃음).
직업병은 없나?
일상에서 어떤 소리가 평균율과 순정률 등 음정에 맞게 들리면 귀가 쫑긋해진다. 길을 걷다가도 음악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음정이 낮네, 높네’를 머릿속으로 분석할 때가 많다.
클래식계에서 젊은 지휘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노장 지휘자를 선호하는 클래식 팬들이 많다. 젊은 지휘자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
예술, 특히 음악은 관객이라는 소비자층이 존재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것도 제각각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나이를 비롯해 성별, 인종, 성격 등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어느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단 나 자신을 가꾸고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평소 클래식 외의 음악도 듣나?
중학생 때까지는 퀸, 마이클 잭슨, 조용필의 음악을 많이 좋아했고 자주 들었다. 그룹 버즈의 노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동네 친구들도 엄청 좋아했던 가수다. 생각해보면 모두 클래식음악 관점에서도 매우 혁신적인 대중 음악가들이었다. 특히 조용필의 대표적인 노래들은 슈베르트 가곡 못지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음악과 함께하는, 음악 속에 있는 삶은 어떤 느낌인가?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듣고 즐기면서 돈까지 버니 먹고사는 게 얼마나 행복하니?” 독일 칼스루에 국립극장 음악감독인 게오르그 프릿치 교수가 수업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은 그런 느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겠다.
무대 경험이 쌓일수록, 곡 해석의 깊이나 경험이 더해질수록 지휘도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지휘’가 있다면?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지휘하다보니 해보고 싶은 지휘는 충분히 하고 있다고 느낀다. 끊임없이 연구해서 더 좋고 발전된 지휘를 하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틸레만같이 세계적인 거장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과거의 지휘법과 현재 지휘법이 매우 다르다. 계속 연구를 한다는 게 느껴진다. 나도 그처럼 평생 연구하고 발전하는 것이 목표다.
단기 목표가 있다면?
8월 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비엔나 방송교향악단과 데뷔연주가 있다. 현재 최고로 핫한 바이올리니스트 마리아 두에나스가 ‘브루흐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하고 교향곡으로는 차이콥스키의 ‘비창’을 연주할 예정이다. 첫 곡은 내가 직접 작곡하기로 했다. 브루흐와 차이콥스키의 대표작들 앞에 선보이는 작품이라 그만큼 부담감이 크지만 좋은 작품을 완성하고 성공적인 연주를 하는 것이 목표다.
윤한결을 롤모델로 지휘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지휘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음악, 사람,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고 긴 시간이 걸리는 길이지만 기회는 정말 많고 그만큼 큰 행복이 따른다. 예술은 정답이 없어서 가늠하기 힘들다지만 정답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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