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그 험상궂은 생김새와 달리 먼 길 굽이마다 나그네를 반겨주는 장승. 장승은 또한 사악함을 물리치는 민초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우리네 얼굴을 그대로 빼박은 장승들을 만나러 떠나 본다.장승은 험상궂고 무서운 생김새와 달리 그 연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애달픈 우리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조선 후기 거듭되는 병화와 돌림병과 기근과 약탈…. 그 혼돈 속에서 우리네 조상들은 마을 입구에 모든 사(邪)를 막는 ‘벽사’의 의미로 장승을 세워 두고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장승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장생표(長生標)로 이어지고, 그 기능은 일종의 표지물이나 경계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풍수도참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산천비보(山川裨補)의 목적으로도 세워졌다. 그러다 조선조 들어 거리 표지판으로 이용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모양새와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장승은 근년의 숨가쁜 산업화의 시대를 거치며 현대화의 물결 속에 낡은 유물로 치부되어 몇몇의 돌장승을 제외하고는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특히 매년 동제를 지내고 새로 깎아 세우던 목장승은 동제를 그치면서 함께 썩어들었다.
장승이라는 존재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대학에서 축제가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등 전 사회적으로 우리 것을 찾고 보존하기에 눈뜰 무렵부터 다시 거리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해 그 기능을 계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일부 광신적 종교인들에게 ‘우상’으로 밀려 목이 잘리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 즈음에는 다행히 많은 도시의 입구에서까지 얄궂게 험상궂은 장승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 개방화의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것을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슴 한쪽에도 장승 한두 개씩을 모셔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RIGHT]사진·권태균/ 글·이항복[/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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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