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center[/SET_IMAGE]서울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2가 대로변, 허름해 보이는 건물 4층. 29년째 귀금속 세공이라는 한 우물만 파온 박창순(47·우진주얼리 대표) 씨의 작업장이 있는 곳이다. 그의 이름 앞뒤에는 ‘귀금속 신지식인’과 ‘명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그의 공방은 꼭꼭 숨어 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 불편하지만 공방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그의 손끝을 거친 화려한 작품들을 만나러 온 고객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지난 11월1일 한국의 명장 중의 명장을 뽑는 ‘제8회 직업능력개발촉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귀금속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도 높게 평가받았지만, 세밀한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 각종 공구를 개발한 그의 노력과 귀금속 분야 기술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B]29년 귀금속공예 외길 인생[/B]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그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행 기차를 탔던 것은 약관의 나이인 스무 살 때.
“배운 것 없이 취직하는 일이 정말 막막한 시절이었죠. 마침 외삼촌이 금은방에 가면 숙식도 해결하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금은방을 찾았죠. 귀금속을 다룬다고 해서 작업 과정도 화려할 줄 알았는데, 이건 여느 공장과 다를 바 없더군요. 하루종일 갈고, 망치로 두드리고…. 처음에는 저거 배워봤자 밥술이나 뜨겠느냐는 생각에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한번 작업도구를 잡고 나니 마음이 확 바뀌더군요.”
호기심에서 작업도구를 잡고 깎고 갈고 하는 과정에서 그는 귀금속 세공의 황홀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심 ‘이것이 천직’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도제시스템’(견습생활)이 남아 있던 탓에 그는 2년 동안이나 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어깨너머로 선배들로부터 기술을 배워야 했다.
“요즘 같아서는 대학 과정에서 한 달이면 너끈히 배울 기술을 그때는 1년씩 걸려 배웠어요. 기술자들은 자신의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웬만해서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한창 세공을 하다가도 수습생들이 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딴청을 피울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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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000년 귀금속공예 명장 올라[/B]
그는 귀금속공예를 시작한 이래 29년 동안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한눈을 판 적이 없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공방 사장이 수습생들 월급을 떼어먹고 도망쳤을 때 잠시 외도를 한 것이 전부였다.
“배신감도 들고, 막막한 심정으로 잠시 다른 일자리를 찾기는 했지만 1년이 채 안돼 다시 공방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그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오직 귀금속공예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지난 2000년 ‘대한민국 귀금속공예 명장’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명장이 된다는 것은 기능인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명장은 선정 과정부터 매우 까다로워요. 최소한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종사해야 하고, 공정 개선이라든지 품질 개선 등 그 분야에서 확실한 업적이 있어야 해요. 귀금속공예 명장은 전국에서 5명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귀금속 세공의 특징은 지름 1㎜ 이하의 작은 보석에 담아내는 세밀한 공법에 능통하다는 점. 지름 1㎜ 이하의 작은 보석으로 원하는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난도 기술과 함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저는 귀금속공예도 마치 하나의 건물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설계하고, 설계된 도안에 따라 정확하게 세공해야 하니까요. 예전에는 설계고 뭐고 없이 주먹구구식이었지만 차츰 디자인과 설계의 중요성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특히 꽃·나무·새 등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02년 세계금협회(WGC) 주최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도 그랬다.
“아무리 훌륭한 보석도 광산에 있을 때는 돌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 장인의 손을 거쳐 비로소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귀금속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보석공예의 매력도 영원하다고 강조하는 박창순 명장은 최근 들어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에는 보석 세공 기술 하나만 있어도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자들이 공법을 잘 공개하지 않았어요. 그러는 바람에 전통공법 중 대가 끊긴 것들이 많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서울산업대와 광주의 동신대학 등을 바쁘게 오가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그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발판으로 ‘청출어람’의 제자를 키워내는 것이 남은 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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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