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황윤 씨| 곽윤섭 기자
오로지 인간의 눈요기를 위해 동물원에 갇혀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동물들의 현실을 새끼 호랑이 ‘크레인’의 시선으로 담은 영화 <작별>, 로드킬(road kill)에 희생당하는 동물들의 삶을 삵 ‘팔팔이’를 통해 보여준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야생동물의 시선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황윤 씨는 지난 2015년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통해 ‘돼지’라는 동물에 주목했다.
2009년 아들 도영이 태어나면서 엄마가 됐다. ‘괜찮을까….’ 약, 음식, 물건 등을 고르며 여느 엄마들처럼 고민과 질문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2011년 구제역 사건이 터졌다. ‘살처분’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도배되던 때. 영화감독 임순례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누군가 다큐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개, 고양이는 제가 맡을 테니 황 감독이 소, 돼지를 맡아줘요.” 이후 <육식의 종말>을 읽던 황 씨는 카메라를 들고 돼지농장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공장식 양돈농장’에서 공장 부품처럼 사육되는 가여운 돼지들 그리고, ‘돼지를 돼지답게 기르는 농장’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돼지들을 만난다.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영화를 찍으며 돼지를 만나고 채식을 하게 된 엄마 그리고 ‘육식파’ 아빠, 그 사이에 있는 아들, 이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보는 내내 관객의 머릿속도 딜레마로 복잡하다. ‘사랑해야 하나, 먹어야 하나….’ 2018년 말, 황 씨는 책 <사랑할까, 먹을까>(휴)를 통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비롯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딜레마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경험하고, 공부하고, 고민한 내용이 담겼다. 3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비건 카페에서 황 씨를 만났다.
-채식을 하는 걸로 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뭐였나.
=톳장아찌, 꽃양배추, 들기름에 간장·깨소금 넣고 살짝 볶은 두부 등을 먹었다. 보통 아들 도영이의 채식 반찬을 싸주고 남은 걸 먹는다.
▶엄마돼지 십순이가 하루 넘는 진통 끝에 여덟 마리 새끼를 출산했다. 십순이는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볏짚을 모아 둥지를 만들었다. | 황윤
“딜레마 빠져나오는 해답 안내”
-‘채식한다’고 하면 영양 불균형에 대한 걱정이 많던데.
=도영이는 어릴 때부터 고기보다 두부와 콩을 비롯해 브로콜리 같은 채소를 좋아했다. 지금은 반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한다. 아이들 성장에는 유전적 요소가 제일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 충분한 수면과 활동, 좋은 음식으로 이뤄진 식사 등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좋은 음식’은 꼭 육류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채식을 한다고 모든 병이 다 낫는다는 건 아니지만 육류 소비량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고혈압, 당뇨, 암, 심근경색, 뇌혈관질환, 비만, 소아암의 발병률이 높아졌다는 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육식파’였던 남편 영준은 어떤가.
=실은 그렇게까지 육식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익숙한 식생활이 침해받을까 봐 방어를 했던 것 같다. 영준은 육식을 완전히 끊은 건 아니지만 고기 요리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내가 차린 ‘비건식’도 잘 먹는다. 시장에서 콩고기를 사오기도 한다. 요컨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 옹호자’가 됐다.
-영화가 육식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다면 책에는 돼지, 육식, 채식 등 매우 풍부한 정보가 있다.
=나 역시 한 번도 육식이나 공장식 축산 등의 이슈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살았다. 관객들도 너무 당연하고 익숙했던 육식 문화에 대해 딜레마에 빠져봤으면 했던 게 영화를 찍은 목적이다. 빠뜨렸으니 빠져나오는 법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완벽한 해답은 아니지만 그 방법들을 안내하고 싶었다. 책 읽은 분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지 않는다. 여러 대안이 제시돼 있으니까.
-육식을 끊기에는 유혹이 참 많은 시대다.
=가족, 학교, 회사, 식당 등 일상이 육류로 둘러싸여 있다. ‘먹방’ 음식 재료도 대부분 육류다. 하지만 육류가 몸에 나쁘다는 정보는 잘 모른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햄, 소시지를 1급 발암물질로, 붉은 육류를 2급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그런데 학교 급식에 육류는 거의 매일 포함된다. 공공영역에서부터 대폭 줄여야 한다. 아이들에게 알 권리와 선택권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학교나 군대 급식 등에서 최소 주 1회라도 채식을 하면 좋겠다.
-해외에선 ‘탈육식’ 움직임이 많이 일고 있는 것 같다.
=학교, 병원 등 공공기관에서 채식 식단이 많이 나온다. 미국 뉴욕시 산하 공공 의료기관에서는 무조건 주 1회 채식이 나온다. 채식을 권장하는 학교도 많다. 벨기에 헨트, 독일 브레멘, 브라질 상파울루,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마이애미, 대만의 타이베이 등이 시 차원에서 주 1회 채식 운동에 동참한다.
▶황윤 씨와 아들 도영군이 풀잎을 이용해 돼지 콧구멍 간질이기 놀이를 하고 있다. | 황윤
“청와대 신년회 채식 떡국 감동”
-청와대에서 주최한 올해 신년회에서 먹은 ‘채식 떡국’을 페이스북에 소개했던데.
=시민 20명 중 한 사람으로 초대받았다. 메뉴가 떡국이라고 해서 고기 떡국일 거라는 생각에 고민했다. 물만 마시고 와야 하나 하다가 채식인들 대표해서 용기를 냈다. 사전에 “선진국들은 이런 공공 파티 등을 할 때 비건으로 열거나 최소한 비건을 선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현장에 가서 깜짝 놀랐다. 채식인을 위해 채식 떡국 30인분을 준비했으니 원하는 분들은 얘기해달라고 하더라. 감동이었다. 식물성 재료로 국물을 우렸는데 정말 진하고 맛있었다. 행사 이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을 보고 “덕분에 참 좋은 경험을 했다. 다른 행사에서도 비건 옵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참고하겠다”고 연락을 주시기도 했다. 정말 기뻤다.
-십순이가 새끼돼지를 낳고 젖 주는 모습을 보며 ‘돼지와 인간의 차이점보단 비슷한 점이 많이 보였다’고 했는데.
=돼지가 어떤 동물이고, 인간과 얼마나 비슷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돼지를 돼지답게 기르는 농장을 찾아가야 했는데 ‘원가자농’ 원중연 선생님, 십순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십순이는 성격이 참 좋았다. 촬영하는데도 스트레스 안 받고 새끼를 잘 낳아주었다.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 볏짚을 모아 푹신하게 둥지를 짓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말 신기했다. 진통을 겪는 모습이 흡사 도영이 낳을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 먹이는 것도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젖 떼려고 새끼와 떨어뜨리니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 못지않게 풍부한 감성과 모성을 품은 존재였다.
-돈수가 도축장으로 가던 길에 만난 트럭 이야기도 인상에 남는다.
=원가자농 작은 트럭이 돈수와 형제들을 태우고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10톤 이상 돼 보이는 트럭이 옆으로 지나갔다. 공장식 양돈농장에서 도축장으로 실려 가는 돼지들. 오물 묻은 몸과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어디서 길러지든 궁극적으로는 도축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돼지들의 숙명을 말해주는 한 장면. 관객들이 ‘CG(컴퓨터 그래픽) 아니냐’고 할 정도로 드라마틱했는데, 사실 나는 이런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 그만큼 도축장으로 실려 가는 돼지가 많다는 얘기다.
-공장식 축산의 끔찍한 현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던데.
=구제역 당시 살처분해서 돼지를 더 이상 키우지 않는 폐축사를 갔는데 피부병 약부터 호흡기질환 약, 장 치료제, 항생제 등 엄청나게 다양한 약병이 있었다. 햇빛도 바람도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수만 마리 돼지, 닭을 몰아넣고 사육하니 질병에 걸릴 수밖에. 이런 육류가 사람 건강에 좋을 수 있을까. 살처분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가슴 아픈 일이다.
-축산업도 결국 이윤 추구가 목적인데 동물복지를 기대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동물복지는 동물을 건강하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2017년 한국을 찾은 킴머 틸리카이넨 핀란드 농업환경부 장관은 “핀란드에서는 1970년대부터 본격 추진한 동물복지 정책 결과 구제역, AI 발병률이 0%”라고 말했다. 동물복지 농장 흐름은 업계도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물복지 농장 축산물이 출시되고 있다. 소비 경향도 바뀌고 있다. 살충제 달걀 사건이 터졌을 때 국민들도 ‘공장식 사육은 우리 먹거리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걸 직감했잖나. 사육 수를 크게 줄이고 동물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더 나은 방식으로, 제대로 기르고, 육류를 제한적인 양만 섭취하는 게 방법이다.
-동물복지 출산으로 가면 고깃값이 비싸지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
=공장식 축산 육류 가격에는 보이지 않는 ‘진짜 비용’이 숨겨져 있다. 구제역, 조류독감 등 전염병이 돌 때마다 정부가 지불하는 살처분, 방역 비용, 죽은 가축에 대한 보상비 등 지금까지 무려 4조 원이 넘는 국가 예산이 쓰였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황윤 씨는 영화<잡식가족의 딜레마>에 이어 책 <사랑할까, 먹을까>(휴)를 출간하며 사람들에게 공장식 축산, 동물복지, 육식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 곽윤섭 기자
“동물복지 축산물 급식 의무화 필요”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어느 날 우연히 동물원에 갔다가 이상행동을 보이는 북극곰을 봤다. 어딘가 마음에 병이 들어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은데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동물들 언어와 시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별>의 주인공 ‘크레인’을 만나며 굳게 다짐했다. ‘내 힘 닿는 데까지, 언제까지나 너희 편에서 카메라를 들겠다’고. ‘너희 이야기를 전하는 통역사가 되겠다’고. 그 약속으로 여기까지 왔다. <어느 날 그 길에서>의 팔팔이,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십순이와 돈수는 모두 크레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동물이 인간의 이용거리가 되지 않고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축산 그리고 채식 관련해서 정책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면.
=동물복지 농장에 더 강력한 인센티브를 주면 좋겠다. 그래야 현재 축산이 동물복지 축산으로 빨리 전환된다. 단체 급식, 특히 학교와 보육기관 등의 급식에서 동물복지 축산물을 사용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도 추진했으면 한다. 한 가지 더 꼽자면 채식 선택권도 대폭 확대되면 좋겠다. 독일 베를린에 가서 놀랐던 게 모든 식당에 ‘베지 옵션’이 있다. 꼭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식당에서 ‘채식 한번 먹어볼까’ 하며 채식을 시도할 수 있는 거다. 개개인의 실천뿐 아니라 제도적인 뒷받침도 돼야 한다.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사랑하면 돼지~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