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새에 미친사람 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27년간 야생 조류 관찰과 보호활동을 해온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이 경기도 김포의 장릉 저수지에서 원앙새를 찍으며 환히 웃고 있다.
팔당의 겨울은 차다. 칼바람이 대지는 물론 강물을 호령한다.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잠복 중이다. 기다림이다. 흉악범을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루 딱 한 번 사냥을 하는 참수리의 사냥 모습을 렌즈에 잡기 위해서다. 벌써 며칠째 허탕이다. 600㎜ 망원렌즈의 사정권 안에서 참수리가 그 강렬하고 치열한 생존 투쟁을 연출해야 한다. 그러니 야생 새를 찍는다는 것은 인내와 함께 운이 따라야 한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흰꼬리수리가 힘겹게 잡은 물고기 누치를 참수리가 군침을 흘린다. 카메라 파인더에 바짝 눈을 대고 셔터에 손가락을 올려놓는다. 마치 저격수가 숨을 죽이고 목표물에 극도의 집중을 하는 형국이다. 셔터 위의 검지가 파르르 떤다. 숨을 멈춘다. 야생의 맹금류끼리 뺏고 빼앗기는 먹이 쟁탈전이 펼쳐진다.
공중을 날던 참수리가 수면 가까이에서 물고기를 잡고 흐뭇해하던 흰꼬리수리를 향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들이대며 먹잇감을 내놓으라고 겁박한다. 흰꼬리수리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다. 겁먹은 흰꼬리수리는 그래도 먹이를 꽉 움켜쥐고 저항한다. 바로 이때 참수리의 특기인 옆차기가 흰꼬리수리를 향해 들어간다. 참수리의 묵직한 옆차기에 가슴을 공격당했지만 흰꼬리수리는 먹이를 놓지 않는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것일까? 참수리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먹이 쟁탈을 포기한다.
▶황금새
“인간의 재단 떠나 생명의 질서일 뿐”
2018년 12월 참수리와 흰꼬리수리의 한판 승부를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은 윤순영(66) 씨는 “인간의 눈으로 선악을 재단할 수 있어도 자연에서는 그냥 생명의 질서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따뜻한 커피가 얼어붙은 몸을 녹인다.
윤 씨가 관찰한 흰꼬리수리와 겨울 철새 오리인 흰죽지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을 엿보자. 2년 전 역시 겨울의 팔당이다. 흰꼬리수리 부부가 번갈아가며 흰죽지를 괴롭히고 있다. 흰죽지는 자신을 노리는 흰꼬리수리를 피해 벌써 5분째 자맥질을 계속하고 있다. 흰꼬리수리 부부는 흰죽지의 힘이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흰죽지가 늘어졌고, 흰꼬리수리의 남편이 수면에 떠오른 흰죽지를 두 발로 움켜쥐고 수면 위를 비상한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로 흰죽지의 목을 따려는 순간 참수리가 나타났다. 흰꼬리수리가 당황하면서 흰죽지를 움켜쥔 발톱에 힘이 빠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흰죽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날개를 퍼덕여 흰꼬리수리를 벗어났다. 흰꼬리수리는 달아나는 흰죽지를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고, 흰죽지는 잡아먹히기 직전 탈출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눈앞에서 전개됐어요”라고 윤 씨는 이야기한다.
▶참매
윤 씨의 야생 새에 대한 관찰과 사랑과 기록은 벌써 27년째다. 현장을 지키고 관찰하는 그만이 간직한 새들의 은밀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경기도 김포의 장릉에 있는 저수지에서는 매년 원앙새 수십 마리가 겨울을 난다. 부부 사랑이 깊다고 소문난 원앙을 하루 종일 관찰한 윤 씨는 “원앙은 부부애가 두텁지만 바람피우는 것도 선수급”이라고 말한다. 하루 15번씩이나 부부 사랑을 확인하는 원앙은 부부가 서로 모르게 바람피우는 것을 흔히 목격했다고 한다. “아마도 좋은 종을 이어가려는 본능인 것 같아요.” 원앙은 반복적으로 30~40분 물에서 먹고 놀고 사랑을 나누며, 1시간 정도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말리고 휴식한다. 수컷은 틈만 있으면 몸으로 비벼대고 부리로 암컷의 몸과 목을 어루만진다. 암컷은 최고조의 몸짓으로 목을 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느낌을 앙증스럽게 표현한다.
▶참수리(아래)와 흰꼬리수리 먹이 다툼
사랑하고 다투고 놀고, 능수능란
윤 씨가 새를 찍고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게 만든 새는 재두루미다. 1992년 김포 홍도평야에서 처음 재두루미를 만났다. 검고 희고 붉은 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우아한 큰 새는 말 그대로 매력적이었다. 그 후 해마다 한강하구와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 일대와 천수만, 그리고 러시아, 일본 홋카이도 등 두루미의 월동지와 번식지를 찾아 다녔다.
위장그물 속에서 인내하며 오랜 시간 두루미를 지켜보면서 윤 씨는 두루미의 언어를 습득했다. 두루미는 새끼와 어미, 가족과 가족, 부부 사이, 그리고 다가서는 인간 사이에 60여 가지의 행동과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한다. 이는 원숭이의 30여 가지보다 월등한 소통 능력이라고 한다. 두루미는 나는 새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이 날고, 새가 보이지 않는 하늘 멀리서부터 나팔을 부는 듯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천상의 새’라고도 불린다. 새끼가 부화 직전 내는 삐악거리는 소리부터 먹이 조르는 소리, 비행 전과 도중 내는 소리, 경계음, 침입자에게 내는 소리, 부부 사이의 유대를 다지는 소리가 모두 다르며, 행동과 합쳐 의사를 표현한다.
▶재두루미│윤순영
수컷은 날개를 등 위로 펼치고 암컷은 날개를 접은 상태에서 수컷이 한 번 소리 지르면 암컷은 짧게 두 번 응답한다. 구애를 할 때 내는 소리다.
날개를 퍼덕이며 “뚜루룩 뚜루룩” 하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다. 짧게 “뚜룩 뚜룩 뚜룩” 하면 동료들에게 적들이 다가오고 있으니 경계하라는 소리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춤을 춘다. 두루미의 사랑 춤은 마주 보며 머리 굽히기, 마주 보며 높이뛰기, 옆으로 몸 비틀기, 고개 숙여 발 구르기, 날개 펴고 발돋음하기, 서로의 주변 돌기 등 2~4분 동안 계속된다. 두루미는 다투기도 한다. 목을 세워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커다란 소리로 운다. 싸움이 격화되면 몸을 날려 부리로 쪼거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일격을 가한다. 어린 두루미는 나뭇가지나 마른풀을 공중에 집어던지고 날아가서 잡는 놀이도 즐긴다. 어른 새도 이 흥겨운 놀이에 끼어든다. 이처럼 감정 표현에 능숙하고 놀이도 즐길 줄 아는 새가 또 있을까.
▶참수리
동아시아 이동 경로 현장탐사 동참
윤 씨는 중학교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가졌다. 고향이 김포인 윤 씨는 앞마당처럼 펼쳐진 드넓은 평야, 그리고 평야를 가로지르는 한강을 벗 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월남전에 파병됐던 삼촌이 귀국하며 가져온 캐논 카메라 덕분에 김포 지역의 자연을 사진에 담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독학으로 사진에 파고들었다. 인화도 스스로 하며 자연을 카메라에 담는 일에 열중했다. 30대에 10여 년 축협에서 근무했고, 1994년 41세의 나이에 김포문화원장을 역임했다. 우리나라 최연소 문화원장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에 끌렸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재두루미를 우연히 만난 것이 인생을 바꾸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습지에서는 2000여 마리의 재두루미가 날아와 월동을 했지만 환경적 훼손으로 이제는 강원도 철원과 일본 가고시마 이즈미시로 주된 월동지를 옮겼다. 하지만 윤 씨의 재두루미 사랑은 식지 않았다.
매년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홍도평야에 오는 재두루미를 위해 매주 100㎏의 볍씨를 들판에 뿌려준다. 그런 정성 때문인지 한때 7마리까지 줄었던 홍도평야의 재두루미가 120마리까지 늘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짓는 인간들의 욕심으로 이제 60여 마리로 줄었다. 윤 씨는 2002~2003년에는 KBS <환경 스페셜> 팀과 동아시아 최초로 러시아, 일본, 한국을 오가며 재두루미 이동경로를 밝힌 작업에 참여했다. 2006년에는 한강하구 습지 지정 당시 일부 주민의 반대를 극복하고 한강하구 습지 지정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새들을 위한 19만 평(628,099m²) 규모의 야생조류공원도 만들었다.
윤 씨는 현재 사단법인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 사진전과 동아국제사진전 등에서 30여 차례 수상했다. 경기도 사진대전 초대 작가이자 운영위원장이기도 하다. 그가 찍은 새 사진은 야생 그대로다. 지금까지 250여 종의 야생 조류를 관찰하고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겼다. 참매가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부화해 이소(離巢)하는 과정을 84일간 촬영하며 관찰하기도 했고, 참수리의 사냥 모습을 담으려 추운 겨울 팔당에서 100일 동안 잠복하기도 했다.
▶원앙새
“후학들 좋은 결과물 만드는 자료로”
그는 새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0cm의 작은 새들이 목숨을 걸고 수천㎞를 날아와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며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한다. “새들은 날아다니며 천적에게 잡아먹히거나 체력이 고갈되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이겨내는 광경을 보고 생명의 존엄성과 귀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왜 새를 찍고 기록을 남길까? “새들의 생활상을 관찰해 글로 쓰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후학들이 이 자료를 참고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생태를 보호한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이기 전에 내가 곧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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