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주선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마을재생센터장
‘나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이긴다.’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부 명예교수와 조수용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함께 쓴 브랜딩 전문서적 <나음보다 다름>은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면 혁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품질이나 기술의 ‘실제적인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식상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나음’보다 ‘다름’이라는 기준은 제품 브랜딩만이 아닌, 도시재생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됐다.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새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재건축은 과거에 더 나은 도시를 만드는 전형이었다. 이제는 저마다 다른 동네가 각각의 색깔을 내는 도시 브랜딩이 필요해졌다. 도시재생과 마을 브랜딩 전략에 관해 듣기 위해 11월 1일 서울 동자동 한 카페에서 국책연구기관인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윤주선 마을재생센터장을 인터뷰했다.
-‘나음’이 아닌 ‘다름’이 도시재생의 키워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음이라는 키워드가 통했던 시대는 성장의 시대다. 역사적으로 세계대전, 산업화 이후에 어마어마하게 인구가 증가했다. 지금은 산을 내려오는 시대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더 좋은 것, 큰 것을 좇고 더 멀리 신도시를 퍼뜨리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성장의 시대에는 더 빨리 만들기 위해 규정에 맞춰 분업으로 효율적으로 일했다. 시스템이 운영자를 앞서는 시대였다. 예를 들면 어떤 공간에 의사, 편의점 직원 이런 사람들이 바뀐다 해도 일정한 시스템이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다. 햄버거를 장인처럼 만들던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가 전 세계에 맥도날드라는 프랜차이즈로 퍼지던 시대였다. 똑같은 햄버거를 각 매장에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빵을 먹더라도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하루에 50개밖에 못 만드는 것을 먹고 싶은 수요가 존재한다. 힙스터(유행을 쫓는 세대), 로컬 크리에이터(창의적 소상공인) 등 사람들이 두드러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오랫동안 하드웨어, 즉 건물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최대한 건물에 돈을 안 쓰는 게 트렌드다. 가성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초기 투자를 낮추고 작게, 작게 실험하는 거다. 금방 다가오는 변수와 불확실성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운영자들이 트렌드가 바뀌면 빨리 그에 맞게 서비스해줄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재개발처럼 새 아파트는 아니라고 해도 공공건물을 동네에 짓는 도시재생의 한계는 무엇일까?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지만, 지어놓은 건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건물을 한번 지으면 평생 유지·관리비가 건립비보다 4~5배 더 든다. 전기비도 내고 유지·보수도 해야 한다. 지을 때는 정부가 돈을 주지만 유지·관리비는 주지 않기 때문에 후세대는 빚을 떠안는다. 건물을 지어도 쓸 사람이 없어진다면 정말 수요가 있는지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적정 규모인지 따져서 지어야 한다. 예전에 모 부처가 개발사업 할 때 지어놓은 건물의 절반이 방치돼 이런 문제가 보도되기도 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고 연금 세대로 돌아오면 세수가 줄어들면서 지방 도시는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일본의 유바리, 미국 디트로이트는 이미 파산을 했다. 우리는 노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건물 짓는 재생 위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전남 목포에 조성된 괜찮아마 을 누리집 갈무리│행정안전부

▶괜찮아마을 홍보 동영상 갈무리
“도시재생이 망하는 이유 보여주는 책”
순서를 바꿔서 이 공간을 운영할 사람들을 먼저 뽑고, 이들이 가장 잘하는 콘텐츠로 발전시킬 역량을 강화하고, 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 공간을 연결해야 한다. 건물이 비어 있다고 무조건 리모델링하고, 관에서 용역을 시켜 콘텐츠를 만들고, 맨 나중에 운영자를 공모하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짓는 재생’에서 ‘잇는 재생’으로 가야 한다. 작은 공간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소해도 되는데 굳이 지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똑같은 문제의식으로 <도시재생의 묘비>라는 책이 일본에서 나왔다. 도시재생 사업이 어떤 이유로 망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생의 방향이 민간과 공공이 협력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동네에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고, 기존에 있는 커뮤니티 바나 독립서점 같은 공간을 공공에 소개하고 이어주는 변화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생 사업을 할 때 민관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계획한 대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불확실성이 높으니 도시재생의 시공 단계에 주민이 참여하지 않으면 그대로 가지 않는다. 도시 정책이나 도시 이론에 ‘디아이와이 어버니즘(DIY urbanism)’이라는 게 있다. 도시재생을 작게 실험해보고 그다음에 확장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지금은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이라는 법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관에서 외부 용역사를 선정하고, 주민 참여가 잘 이뤄지지도 않는다.
도시재생 기획도 중앙부처에서 다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민간에 권한을 이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만 공공의 역할은 민간에 대한 모니터링을 잘해야 한다. 이건 민영화와는 다르다. 소유권은 공공이 갖는 거다. 관에서는 창의력과 콘텐츠 파워가 없지 않나. 소셜 벤처나 로컬 크리에이터도 있고, 지역에서 사회적 공헌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더라도 방향성이 크게 바뀌지 않게 말이다.

▶전남 목포 영산로에 있는 ‘괜찮아마을’의 청년들│공장공장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동네 만들어야”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연구를 할 뿐만 아니라,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이 떠난 군산에서 실제 도시재생 활동을 하고 있다.
=SK E&S가 도시재생 프로젝트 ‘로컬라이즈 군산’을 사회적 공헌으로 추진 중이다. 23개의 창업팀을 선정했고, 그 팀들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팀당 1000만~5000만 원의 지원을 받는다. 현재는 그 프로젝트에서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이에 앞서 2년 정도 국토교통부와 함께 영화 시장 활성화를 위한 ‘영화 타운’ 프로젝트를 군산에서 시작했다. 이 또한 민관협력 사업이다. 민간의 주도로 운영자를 먼저 뽑은 뒤에 공간을 만들었다. 민간 차원의 도시재생은 속도가 더 빠르다. 로컬라이즈 군산에 참여한 7개팀은 직접 계약을 해서 이미 오픈을 했다. 지방 도시에서 청년 창업을 지원할 때 ‘청년몰’을 만들고 6개월 교육한 다음 ‘알아서 해라’가 아니라 장기 지원을 해야 한다. 다만 의존성이 생기지 않게, 돈을 못 벌어도 괜찮다는 생각은 갖지 않도록 한발 뒤에서 지원해주는 게 필요하다. 10월에는 로컬라이즈 군산과 영화 타운이 함께 축제를 벌였다.
군산의 경우는 지엠대우, 현대중공업이 빠졌지만 그 대안으로 또 다른 공장 유치는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들어와봤자 인건비 때문에 인도 등으로 빠져나갈 거니까. 이미 인구 쇠퇴를 겪고 있고, 큰 산업 유치가 불가능하다면 창의적인 사람들이 스타트업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브랜딩하는 회사들이 뉴욕에서 서부 오리건주에 있는 포틀랜드로 넘어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포틀랜드에서는 창의력을 충전할 수 있는 동네에 살 수 있다. 오후 6시에 퇴근하고 나서 운영자들이 시즌마다 도전적인 시도를 해서 만든 수제 맥주를 마시고, 창의력을 충전할 수 있는 동네 서점에 가고, 축제도 많은 그런 도시에 브랜딩 기업들이 들어온다. 음식점, 공원 같은 데서 창의적인 이벤트, 창의적 대화가 이어진다.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동네로 만드는 것이 바로 도시 브랜딩이다.

▶3월 15일 전북 군산시에서 열린 ‘인큐베이팅 오피스 입주식’에서 SK E&S의 ‘로컬라이즈 군산’ 프로젝트에 참가한 청년 기업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SK E&S
“목포의 ‘괜찮아마을’ 눈에 띄어”
-마을 브랜딩은 특정 기획자 주도로 톱다운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브랜딩 용역을 많이 했다. 예능 프로그램을 들어 설명하면, 예전에 ‘신화’ ‘SES’ 같은 아이돌에게는 콘셉트라는 게 있었다. 멤버 마다 영어 랩 담당, 요정, 이런 걸 정해줬다. 요즘은 기획사가 콘셉트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매력을 드러내며 인기를 얻는다. 브랜딩을 톱다운 방식(상위의 프로그램을 먼저 만들고, 이어서 하위 프로그램으로 순차로 옮겨가는 방법)으로 해선 안 된다.
군산에서 도시재생 할 때 군산의 힘이 뭐냐고 물어보면 오래된 적산가옥, 군산 짬뽕이 유명하다고 한다. 이것보다는 군산의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군산의 크리에이터, 그 사람들의 개성이 더 중요하다. 군산에는 음대와 미대가 있다. 여기 졸업한 분들이 군산에서 희한한 가게를 많이 낸다. 선착장에서 주운 쓰레기로 카페를 만들기도 한다. 재밌는 사람들은 확실히 지역의 색깔을 낸다. 지역 브랜딩은 전문가가 심어주는 게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 폭발할 수 있게 계속 콜라보(협업)하는 것이다. 이게 터져야 한다. 그래야 마을 브랜딩이 오래간다.
넓은 의미로 도시재생을 생각한다면, 다양한 부처에서 유사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도시’, 해양수산부의 ‘어촌뉴딜 300’ 사업이 그렇다. 이 가운데 지역재생을 위한 운영자를 먼저 육성하고, 이 운영자들에게 맞는 지원 정책을 펼치는 행정안전부의 ‘괜찮아마을’이 눈에 띈다.
2018년 전국 최초로 전남 목포에 생긴 마을이다. 한 번쯤 실패했더라도 다시 인생을 설계하고 싶은 수도권 청년들을 지역에 정착시키고, 이들이 인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마을을 재생하는 프로젝트다. 목포의 한 시인이 무상 제공한 건물에 수십 명의 청년들이 6주 동안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동네 어르신들과 친분을 쌓았다. 자연스레 동네 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 청년이 목포에 남기로 결심하며 게스트하우스와 채식 전문 식당 등을 창업했다. 사람을 먼저 키우고 이들이 마을의 콘텐츠를 만들며, 필요하다면 정부에서 하드웨어 지원을 해나가는 방식이다. 목포의 ‘괜찮아마을’은 건물부터 짓는 게 아니라 재밌고 활력 넘치는 사람들이 도시재생의 자원임을 보여준다.
글·사진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