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74년 만에 청와대가 개방돼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청와대로 끊겼던 서촌과 북촌을 연결하는 관광 경로가 완성됐다. 청와대 방문 인파가 늘어나면서 북촌과 서촌 일대 상권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중심 소통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10월 10일 개방 5개월을 맞은 청와대와 그 일대를 찾았다.
아침이지만 청와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출발해 청와대 분수대 앞에 도착했다. 법적으로 대통령 관저 100m 이내에서 집회 금지로 이곳은 집회 장소였다. 개방 이후 달라진 점은 1인 시위와 집회 구호 등이 사라지고 청와대를 찾은 관광객의 설렘만 남았다.
가까운 청와대 출입구는 정문, 춘추문과 함께 이용되는 영빈문이다. 바로 앞에서는 청와대 뒤편 백악산(북악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려 때 이후 서울을 ‘높은 곳’에서 보던 산이다. 청와대가 자리한 북악산 남쪽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104년 고려 숙종 때 북악산 아래 별궁이 지어지고 남경으로 정해졌다. 조선이 건국된 뒤 경복궁이 조성되면서 현재 청와대 자리에는 후원이 조성됐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폐허로 방치되다가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며 청와대 일대는 경무대라는 이름의 후원으로 조성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그 자리에 조선 총독 관사가 들어섰다. 이 건물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됐다. 1991년 현재 본관 건물이 새로 건축됐다.
1인 시위 대신 관광객들 설렘으로 가득
청와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은 영빈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을 위한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1층은 외국 국빈의 접견 행사 장소로, 2층은 만찬장으로 활용됐다.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뉴스나 사진으로 종종 접하던 곳이다. 직접 보는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관람객들의 관심은 영빈관보다 본관이었다. 빠르게 훑어본 뒤 바로 향한다. 권력의 심장부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1년 전만 해도 누가 여기를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지방에서 왔다는 70대 방문객은 “청와대 앞길조차도 쉽게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쪽을 들어올 수 있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본관은 한옥다웠다. 팔작지붕 위에 올라앉은 15만여 개의 청기와가 압권이다. 청기와는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궁궐 지붕에 쓰였던 기록이 있다. 청기와 생산에는 전략자산이자 화약의 핵심 원료 염초(질산칼륨)가 다량 소요된다. 자연적인 초석 광산이 없던 한반도에서는 염초가 귀해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했다. 가을 햇빛을 받은 청기와가 거대한 파도의 푸른 물결을 보여준다.
본관 앞에는 넓은 잔디밭 대정원이 펼쳐져 있다. 그 옆 소정원을 통해 관저로 향한다. 그 길에 수궁(守宮)터가 있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 일대는 경무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전각을 허물고 관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관사는 철거됐고, 현재는 관사 현관 지붕 위에 장식으로 놓여 있던 절병통만 옛 자리에 놓여 있다. 수궁터에는 수령이 700년이 넘는 주목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영빈문 나가면 후궁들 사당 칠궁
수궁터를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관저다. 본관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구조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ㄱ’ 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마당 한쪽에는 사랑채인 청안당이 있다. 관저 뒤로 올라서면 청와대 내 역사문화유산인 오운정과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관저 아래 상춘재도 관심이다. 외국 귀빈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이다. 그 아래 녹지원은 청와대 최고의 녹지 공간이다.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던 넓은 공간이다. 가운데 반송(盤松)이 눈길을 끈다. 수령이 170년을 넘는 귀한 몸이다. 상춘재 위로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침류각이 있다. 주변에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이자 출입기자들이 상주하던 춘추관이 있다. 그 앞 헬기장인 잔디밭에는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청와대를 처음 찾았다는 프랑스인 관광객은 “북촌도 가봤는데 청와대는 다른 멋이 있다”며 “외국인들의 관심이 많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까지 갔으니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영빈문을 통해 나가면 청와대 담장 옆에 붙어 있는 칠궁이다. 조선의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의 신위를 모신 장소다.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있는 종묘는 아니지만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며 따로 모시는 공간을 만들어 효를 다한 공간을 한곳에 모은 장소다.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후궁의 사당 7개가 1908년 이곳으로 합쳐져 칠궁이 됐다. 장희빈의 신주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도 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검소하고 아늑한 느낌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주변 서촌과 이어져 볼거리 풍성
가까운 곳은 서촌이다. 청와대는 자체도 볼거리지만 주변 서촌과 연계돼 볼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서촌은 과거 중인(中人)으로 붐볐던 지역이다. 1963년 박정희정부 당시 여러 규제로 쇠퇴했다가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잠저(창의궁)의 흔적도 남아 있고, ‘인왕제색’도 속 풍경도 간직하고 있다. 최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카페도 많이 생겨났다.
서촌의 매력은 실핏줄 같은 골목길의 고즈넉함이다. 오래되고 낡은 골목길을 여유 있게 걸으면서 세련된 또는 레트로한 가게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매력 있고 개성 넘치게 꾸민 곳도 많다. 특히 창성동 리안갤러리 앞 맞은편 골목엔 깨진 구들장을 쌓아놓은 게 매력이다. 경기도 시흥에서 조카들과 찾은 관광객은 “인근 갤러리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며 “볼수록 멋져 수시로 찾는다”고 전했다.
남호철 <국민일보> 여행선임기자
영빈관 18개 돌기둥·대통령이 심은 나무도 챙겨볼 만
개별 관람 때 놓치기 쉬운 명소
청와대 관람 시 안내 해설을 들으면 청와대의 역사적 사실과 장소에 얽힌 일화를 들을 수 있다. 해설은 오전 10·11시, 오후 2·3·4시 진행된다.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개별적으로 관람을 한다면 놓치기 쉬운 곳이 적지 않다.
먼저 영빈문으로 들어서면 청와대 영빈관이 웅장하다. 이곳에서 관심을 둘 것은 경회루를 연상시키는 18개의 돌기둥이다. 특히 건물 앞쪽 돌기둥 4개를 유심히 봐야 한다. 둘레 3m, 높이 13m로 건물 2개 층을 통째로 지탱하는 석주다. 이음매 없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역대 대통령이 심은 나무도 찾아보자. 본관 옆 소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이팝나무는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심은 것이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렀던 수궁(守宮)터 중앙에는 2014년 정이품송 후계목을 심었다. 수궁터 안쪽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심은 산딸나무도 있다.
수궁터는 옛 건물이 철거되고 빈터로만 남아 있어 관람자가 그냥 지나치기 쉽다.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이었던 길지(吉地)로서 일제강점기 때 총독 관저가 있었고,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의 구본관이 있던 곳이다.
춘추문으로 들어가 관저로 향하면 오른편에 전통 한옥 침류각(枕流閣)이 보인다. 침류란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79㎡(약 24평) 규모다. 중앙에 방과 넓은 마루인 대청을 두고, 앞쪽으로 누마루를 설치했다.
가장 깊숙한 공간인 관저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잡상(雜像)’이다. 무인상과 행자 등의 형상을 한 장식 기와로 궁궐 등 최고의 격식을 갖춘 추녀마루에 줄 맞춰 줄줄이 앉힌다. 잡상의 숫자가 드러내는 건 집의 서열이다. 중국에서는 자금성 태화전의 잡상이 11개로 가장 높은 등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복궁 경회루의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 청와대 본관의 잡상도 11개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청와대 뒤 백악산으로 올라보자. 백악산을 따라 담장 안쪽을 끼고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에는 모두 4개의 전망대가 있다. 백악정을 지나 닿는 청와대 전망대가 압권이다. 경복궁과 광화문 네거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