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들이 누대에 걸쳐 즐겨 그린 유명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BC 610년경~BC 580년경)다. 사포는 용모와 재능이 빼어나 예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레스보스섬의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한때 섬에서 추방돼 시칠리아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쨌든 생애 대부분을 자신의 고향에서 시를 지으며 지냈다.
▶ 로렌스 앨머-태디머, ‘사포와 알카이우스’, 1881, 유화, 볼티모어, 월터스 아트 갤러리
아름다운 시어로 누대에 걸쳐 칭송을 받은 사포. 독자로 하여금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데 뛰어났던 고대 시인으로 꼽힌다. 사포의 시어는 세속적이었고, 시구는 간결하고 회화적이었다. 자신의 환희와 고통을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차분함이 엿보였고, 그 차분함 속에서도 원초적 감정의 힘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방대한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는 ‘아프로디테 찬가’를 포함해 서너 편뿐이고, 그 밖에 700여 행에 이르는 인용이나 단편이 남아 있다.
사포는 주로 가까운 여성들과 나눈 우정이나 미움을 노래했다. 그가 레즈비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이와 관련 있다. 당시 레스보스섬의 부유층 여성들은 사교 모임을 통해 우아한 여가 문화를 즐겼는데, 특히 시를 짓고 낭송회를 갖는 것이 큰 유행이었다. 이런 모임의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포는 남다른 카리스마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예찬자가 찾아올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사교 모임의 성격상 안팎으로 넘쳐나는 사랑과 우정, 질투, 미움, 경쟁의 드라마는 사포에게 시적 영감의 원천이 돼주었다. 사포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부드러운 흠모에서 열정적인 사랑까지 다채롭게 표현했다. 이런 자료들을 오늘에 비해 세세히 살필 수 있었던 고대의 평자들은 사포가 레즈비언이었다고 단언했다. 물론 시구로만 보면 우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만으로 사포와 그녀의 동료들이 동성애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사포와 어우러진 레스보스섬 여성들의 문화가 오늘날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서양미술사에서 사포는 매우 낭만적인 미인상으로 표현되곤 했다. 이를테면 수금을 든 비너스의 이미지 같은 게 그것이다. 특히 누드의 경우 수금이 옆에 있어서 모델이 사포인지 알 수 있지 그 모습 자체는 여느 비너스나 님프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사포 주제는 이런 낭만적인 미인상보다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모습이다. 사포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파괴적인 결말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신화로 승격시켜버렸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사포의 죽음’이 이 주제를 다룬 대표적인 걸작이다.
사포가 레우카스 절벽의 ‘연인들의 투신 바위(Lover’s leap)’에서 뛰어내린 것은 그렇게 하면 죽지도 않고 상사병도 낫는다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틸레네의 선원 파온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끝내 이룰 수 없어 투신을 감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사포는 상사병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시구에 그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더 이상 베를 짤 수 없어요.
차라리 아프로디테를 탓하세요.
그녀 때문에
저 소년에 빠져 내가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까요.
(사포,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림에서 화가는 시인의 비극적인 종말을 광활한 공간 너머 뉘엿뉘엿 지는 해로 강조했다. 비록 투신했으나 평안히 잠들어 있는 사포의 주검. 화려한 그의 치장은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과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취향을 지닌 사람이었음을 나타낸다. 그 화려한 주검을, 한 마리의 흰 새가 저승에서 배웅 온 사자인 양 맞는 장면이 다른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 귀스타브 모로, ‘사포의 죽음’, 1876, 유화, 생 로 미술관
모로에게서 이 그림을 선물 받은 한 문인은 감사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넣었다.
“당신의 사포는 끝없는 시의 한 페이지입니다. 당신의 뮤즈처럼 음울하고 달콤하고 심오한….”
시인으로서 사포의 카리스마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은 영국 화가 앨머-태디머의 ‘사포와 알카이우스’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소나무가 시원한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당대 최고의 시인인 사포와 알카이우스가 서로 시를 교환하고 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이처럼 즐겨 시를 교환했다고 한다.
사포 주위에 아리따운 소녀들이 앉아 있는데, 이는 사포를 레즈비언으로 표현하기 위한 화가의 연출이라 하겠다. 강독대에 턱을 괸 사포는 지금 알카이우스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다. 알카이우스는 수금, 엄밀히 말하면 키타라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 악기에는 음악의 신인 아폴로와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가 조각돼 있다. 시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부드러운 노래처럼 다가오는 그림이다. 그 정점에 꽃처럼 피어 있는 사포의 모습이 무척 매혹적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학고재 관장을 지냈다.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내 마음속의 그림>,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이주헌의 아트카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