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60.5×97cm, 캔버스에 유채, 1866,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예술가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변화와 개혁의 실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일까? 창작을 업(業)으로 삼는 예술가들에게 창의성과 도전 정신,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는 숙명적이자 필수 불가결한 유전자(DNA)다. 역사적으로 시대를 뒤흔든 위대한 자취를 남긴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창의적 사고와 의심하기, 비틀어 보기, 관습과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 소유자들이었다.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들쑤시며 이단아 취급을 받은 에두아르 마네도 예술가의 전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마네가 활동하던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출세하려면 살롱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야만 했다. 파리 살롱전은 화가로서 입신양명이 보장되는 당대 최고 권위의 등용문이라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앞다퉈 참여하던 선망의 무대였다. 살롱이라는 명칭은 전시 장소인 살롱 카레(사각형의 방)에서 유래했다.
기득권의 벽은 높았다. 31세이던 1863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심사위원들의 거센 비난과 함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림은 화창한 날씨의 대낮 숲속에 양복 입은 두 신사와 완전히 벌거벗은 여인이 여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낙선 이유는 그림이 지나치게 퇴폐적인 데다 회화의 기본 원리인 원근법도 지키지 않는 등 심사 대상에 오를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두 차례 전시로 프랑스 미술계 뒤흔들어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마네가 아니었다. 평소 미적 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적이라는 전향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던 마네는 가만있지 않았다.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낙선전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내걸었다. 반전이 일어났다. 마네 그림에 대한 반향은 뜨겁다 못해 폭발적이었다. 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살롱 심사위원들에게서 외면당한 혈기왕성한 젊은 화가들이 마네의 그림에 열광적이었다.
마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거장으로서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미적 평가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는 시대정신과 궤를 같이할 때 진정성이 드러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림은 일체의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그림 자체의 본질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예술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 인물을 그린 것도 이 때문이다.
마네의 도전은 2년 후인 1865년 또 한 번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살롱전을 통해 알려진 ‘올랭피아’라는 작품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매춘부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채, 당당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이 그림은 당연히 저질과 외설 논란의 중심에 섰다.
두 차례의 전시로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든 마네는 1866년 또 하나의 문제작을 살롱전에 선보인다. 출품작은 ‘피리 부는 소년’, 결과는 역시 낙선. 원근감도 없고 입체감도 없는, 그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평가였으나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에밀 졸라가 거세게 반박했다.
“…머지않아 우리 후손들은 마네의 그림을 보고 감동할 것이다. 지금 미술계 실세들의 그릇된 눈으로는 마네 그림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마네는 1883년 4월 매독 합병증으로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개최된 마네 추모 전시의 도록 서문도 에밀 졸라가 썼다. 추모전이 끝나자 마네의 그림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시작 알리는 이정표
1820~1830년대, 사진의 발명으로 대상의 재현에 뿌리를 둔 회화의 역사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광학 원리를 이용해 실물을 원형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 앞에서 그림이 간직한 종전의 부가가치는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 화가들은 새로운 회화의 부가가치를 찾아 나섰다. 사진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근대미술이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전기(轉機)를 제공했고, 인상주의는 그 선두에서 맹활약한 대표적인 미술 사조다. 인상파 화가들 스스로 대부로 받들며 존경한 마네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은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의 태동을 알리는 메신저 성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그림의 배경이 없다는 점이다. 바닥도 없다. 배경과 바닥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없이, 소년의 주위를 온통 회색조의 공간만이 에워싸고 있다. 어디가 배경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의 모습도 특이하다. 검은색, 붉은색, 흰색, 노란색 네 가지 색만 강렬하게 드러나고 바지 옆을 장식한 검은색 긴 띠 형태의 윤곽선만 뚜렷할 뿐, 소년에게서 어떤 입체감과 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 만들기’ 게임처럼, 소년을 그린 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붙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3차원의 공간감과 양감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평면적인 종이 캐릭터 소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당대의 미술 철학을 신봉한 살롱전 심사위원들이 어이없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그림의 평면성은 새로운 미술을 꿈꾼 마네가 의도한 것이고, 그것이 현대미술을 잉태하는 군불이 되리라고는 권위적인 심사위원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마네가 이 그림에서 공간감과 입체감을 지우고 단순하게 평면성을 강조한 것은 사진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전통적인 회화 정신을 회화 본연의 순수한 실체적 탐색으로 대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회화의 시작, 곧 색채와 선과 면의 근원적 조화를 통한 회화의 본질(오리지낼러티)을 추구한 것이다. 마네의 시도는 훗날 점, 선, 면, 색으로 구성된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피리 부는 소년’이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 같은 작품인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이 그림은 평면성을 부각했으면서도 배경과 바닥을 없다시피 단조로운 회색 일색으로 처리하고 정면에서 소년을 향해 빛이 비치는 구도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을 강력하게 부각하는 효과를 낳았다. 전통 회화의 원리를 무시했는데도 소년이 진짜 살아서 피리를 불고 있는 것처럼 생동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마네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다.
‘피리 부는 소년’은 1986년 오르세미술관 개관 때 루브르박물관에서 이전된, 오르세미술관의 간판 작품이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