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기부한 손세기·손창근 부자
소중한 유물을 모두의 유산으로 남긴 한 가족의 이야기는 시린 겨울 같은 고난도 함께 견뎌내자는 ‘세한도’와 더불어 따뜻한 울림을 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월 9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손창근(91) 선생을 청와대로 초청해 “선친인 손세기 선생님과 함께 대를 이어 소중한 문화재를 수집·보호하고, 평생 수집한 문화재를 국민의 품으로 기증해 주셨다”며 “‘세한’(설 전후의 추위)이라는 말이 공교롭게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우리 국민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는 코로나19로 지친 국민께도 큰 힘과 희망,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손 선생은 2018년 추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서화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데 이어 2020년에는 마지막으로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까지 기증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전날 문화재청 주관 ‘2020년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에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 문화유산 정부 포상이 시작된 이래 금관문화훈장(1등급) 수훈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평생 수집한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왔으며, 2020년 2월에는 금전으로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 ‘김정희필 세한도’를 기증해 국민 모두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했다”며 “국민 문화 향유 증대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지도층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통해 개인 소장 문화재에 대해 금전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세태에도 큰 울림을 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용비어천가> 초간본 | 국립중앙박물관
▶불이선란도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등 기증으로 금관문화훈장 수훈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직원과 차량을 보내 손 선생을 모셔오도록 했다. 손 선생의 아들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 부부도 동행했다. 문 대통령은 차량이 도착하는 청와대 본관 입구에 직접 마중 나가 손 선생을 맞았다. 문 대통령은 차에서 내리는 손 선생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세한도’의 14m 전체 모습은 최근에야 공개됐다. 세한도는 한때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가 1944년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포탄이 쏟아지던 도쿄의 일본인 손에서 돌아왔고, 이후 개성 출신의 고 손세기 씨가 사들여 50년 가까이 대를 이어 간직해오다 기증된 것이다. 18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주인만 열 번 바뀐 끝에 올 초 모두의 그림이 됐다.
앞서 손창근 선생은 2018년 11월 21일 대를 이어 모은 유물 202건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1447년 편찬한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가 그린 유명한 난초 그림인 ‘불이선란도’가 포함됐다. 17세기 명필 오준과 조문수가 쓴 서예 작품, 겸재 정선이 종로구 서촌에 있던 장의동 북원에서 마을 원로의 장수 기원 잔치를 묘사한 ‘북원수회도(北園壽會圖)’가 수록된 화첩, 김정희가 남긴 ‘함추각(涵秋閣) 행서 대련’과 예서 글씨 편액인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도 기증됐다. 이 밖에 심사정, 김득신, 전기, 김수철, 허련, 장승업, 남계우, 안중식, 조석진, 이한복 작품과 오재순, 장승업, 흥선대원군 인장도 박물관에 전달됐다.
박물관은 손세기·손창근 부자의 기증 정신을 기리기 위해 상설전시관 2층 서화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만들었고, 2018년 11월 22일부터 2019년 3월 24일까지 김정희 서화에 초점을 맞춘 명품 서화전을 열었다. 당시 손 선생은 기증식에서 “한 점, 한 점 애착이 가는 물건”이라며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어서 고민하다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고 기증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귀중한 유물을 길이길이 잘 보관해주길 부탁한다”며 “손 아무개 기증이라는 설명만 붙여주면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기념 사진을 촬영한 손창근(가운데) 선생과 아들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 부부. |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이 12월 9일 세한도 기증자 손창근 옹을 청와대 본관 앞에서 맞이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립중앙박물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손씨 부자는 유물과 재산을 국가와 학교에 잇따라 기부했다. 부친인 손세기 선생은 1974년 서강대에 보물 제1624호로 지정된 ‘양사언 초서’를 비롯한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아들인 손창근 선생은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기금 1억 원을 쾌척했고, 2012년에는 자비로 가꾼 용인 산림을 정부에 기부했다. 2019년에는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1억 원을 전했다.
김정숙 여사는 이날 손 선생에게 세한도에 담긴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길이 서로 잊지 말자)’ 글귀를 자수로 새긴 비단 천과 손수 만든 곶감, 무릎담요를 선물하며 ‘오래 잊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202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국보 180호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이다.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린 것으로 차가운 세월을 그렸다는 뜻이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선비 정신을 담은 문인화의 정수이자,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란 평가를 받는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해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놓았다.
원래는 가로 69.2㎝, 세로 23㎝ 크기인데 이후 청나라 명사 16명에게서 받은 감상문을 비롯해 근현대의 오세창, 정인보 등의 글이 붙어 총길이 15m에 육박하는 두루마리 장권(전체 크기 33.5×1469.5㎝)이 되었다. 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이 ‘세한도’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은 이러하다.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 …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 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 옹의 마음을 엿보다.”
손창근 선생은 ‘세한도’ 한 점을 남겨두다 2020년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집에서도 아들에게 ‘세한도’를 딱 한 번 보여줬고, 기증 사실도 나중에야 알렸다고 전해진다.
박유리 기자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 테마전
▶2018년 11월 21일에 진행된 손세기 손창근 컬렉션 기증식에서 손창근 선생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그림 ‘세한도’는 2020년 초 소장자의 뜻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1년부터 작품을 기탁받아 관리해왔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세한도 소장자인 손창근 씨가 그간 박물관에 기탁해온 작품을 아예 기증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올 1월 박물관 측에 전화해 기증 의사를 밝혔고, 설 연휴 직후 만남이 성사돼 기증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2018년 대를 이어 소장해온 수집품 304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세한도’ 한 점만은 기탁 형태를 유지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미 “언젠가 국가에 내드릴 것”이란 취지로 말했고, 올 초 결심을 굳힌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1월 24일부터 특별기획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을 통해 세한도를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12월 8일부터 관람이 중단된 상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세한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온라인 강연과 테마전을 마련했다. 특별전 연계 온라인 강연은 12월 3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1차 강연을 시작으로 화요일마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다. 김정희를 연구해온 석학 유홍준(명지대학교), 최완수(간송미술관), 박철상(한국문헌문화연구소)의 강연이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3차 강연(12월 15일)에서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이 ‘세한도’에 초점을 맞춰 그림의 제작 배경과 가치를 설명했다. 최 실장은 “(제자) 이상적은 사지에 몰린 김정희의 비참한 처지에도 아랑곳 않고 새로운 책이 나오면 온갖 노력을 기울여 김정희에게 전달했다. 이에 감동한 김정희는 평생 공부한 학예를 바탕으로 제자의 의리를 칭송한 ‘세한도’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세한도’와 ‘평안감사 향연도’는 조선의 관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과 가장 영예로운 순간을 상반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면서 “삶의 고락이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겨내고 기뻐할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