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일장의 모습. 정조는 규제개혁을 통해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판 뉴딜은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대한민국 대전환 프로젝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29년부터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이 극심한 경기 침체에 빠지자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뉴딜로 일컫듯이, 여기에 빗대어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반 정책들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는 여러 이유로 나라 안팎에서 큰 혼란과 위기를 자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결단과 혁신 정책으로 위기를 위대한 도약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고 거북선과 수원화성으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 가깝게는 일관제철소 건설과 반도체 투자로 ‘경제강국 코리아’를 일궈냈다. 위기의 순간에 좌절을 극복하고 생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전환에 도전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룬 역사적 혁신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한국판 뉴딜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본다. <편집자 주>
정조의 통공정책과 한국판 뉴딜
연암 박지원이 <허생전>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상업 활성화를 통해 누구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론 상업 행위를 천한 것이라 경멸하는 양반 사대부의 위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정말 박지원은 대단한 이야기꾼이자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혁명가였다.
그가 쓴 <허생전>대로 조선 사회가 아무나 가서 과일과 말총, 유기를 사고팔 수 있었을까? 아니다. 조선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정조가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해통공이란 무엇인가? 신해는 신해년을 의미한다. 신해년은 1791년, 정조가 즉위한 지 15년 되는 해다. 통공이란 무슨 말인가? 통공은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해통공이란 1791년에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상업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1791년 이전까지는 조선의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시전상인, 즉 도고(都賈)를 제외하고 조선의 백성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시전상인들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조정 관료들과 연대가 되어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는 일에 충실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경유착인 셈이다. 그러니 시장에서 거래되는 각종 품목에 대해 독점권을 가진 이들이 모든 백성이 장사할 수 있는 개혁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는 백성이 모두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어야 국가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채제공을 비롯한 자신을 지지하는 고위 관료와 실무 경제관료들과 함께 추진하고 진행했다.
▶정조대왕 초상화│한겨레
399년 동안 이어진 잘못된 정책 혁파
신해통공은 조선 건국 후 399년 만에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개혁인가. 지금 우리 정부나 기업도 과거에 만든 정책이라 해서 새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이 허다한데 정조는 399년 동안 이어진 잘못된 정책을 과감히 혁파했다. 이와 같은 규제개혁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배워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면 신해통공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당시 통공정책을 추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가? 조선시대는 독점권을 갖고 있는 시전상인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었다. 바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난전을 금하는 권리다. 백성이 팔고자 하는 물품을 가져와 길거리에서 임시로 난전을 만들면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으로 장사를 못하게 했다. 그러니 일반 백성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시대가 갈수록 금난전권을 가진 상인들의 권한은 더욱 커져갔다.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힘을 계속 키워나간 것이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강화는 도시의 경제질서를 딱딱하게 만들어 융통성이 떨어지고, 독점권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초래해 영세상인과 수공업자 그리고 도시 빈민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 금난전권을 소유한 특권 상인들이 노론 계열의 힘 있는 가문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시전상인들이 특정 가문과 정치 관료들에게 경제적 후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난전권의 유지는 탕평정책을 추진하는 개혁 세력들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제도였다. 정조는 도시 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도 실천하고, 한편으론 노론 핵심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배려가 진행되었다.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던 논의는 영조 대인 1764년(영조 40)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를 전후해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발매(通共發賣)’의 이론이 나타났던 것이다. 통공발매란 독점 상권을 누려왔던 시전에 대한 전매 특권을 폐지하고, 사상인에게 자유로운 상품 매매를 허용하는 시장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조 대에 조정 관료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조 시대 들어와 통공발매론은 1787년(정조 11)에 일부 시행되었고, 이를 정미통공(丁未通共)이라 한다.
이때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 혁파 논의가 나타났지만 실제 사례가 없어 제대로 정책을 만들 수 없었다. 정조는 과감한 개혁을 위해 수원 신도시에서 이를 실험하고자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석 명절을 앞둔 9월 2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전통시장을 찾아 장을 보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수원 시전 만들어 새로운 경제정책 실험
1789년(정조 13) 7월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관아가 있는 읍치(邑治)를 팔달산 일대로 이전하고 수원 시전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험했다. 정조의 측근이자 우의정인 채제공과 비변사는 수원의 경제 육성을 위해 서울의 부호 20호를 선발해 중국과 무역하는 품목인 관모(官帽)와 인삼의 유통권을 수원에서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절목(오늘의 법)을 입안했다. 상인들의 자본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영남 감영의 남창에 속한 5만 냥과 평양 감영의 5만 냥을 수원의 이주 상인들에게 지원해 밑천으로 삼게 했다.
모자와 삼이 주된 무역 품목이지만 만약 더욱 중요한 물품이 생기면 그것도 자연스럽게 품목에 넣어 마음대로 무역하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수원으로 이주해 상업 행위를 하려는 이들이 대부분 한양의 상인이었고, 그중에서도 의원과 역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의원들 역시 조선 후기에 상업 행위에 뛰어들었고, 역관들은 조선 무역의 중추였다. 하지만 이들이 수원 지역의 새로운 상업 행위에 주축이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좌의정 이병모는 생각했다.
이병모가 수원의 시전 설치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정리해 정조에게 여섯 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 첫째가 서울의 부호가 수원으로 내려갈 경우 서울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고, 둘째가 모자와 인삼만으로 수원을 발전시키기 어려우니 다양한 품목으로 장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셋째가 서울의 부호들이 정작 수원에 완전히 거주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수원 경제권을 장악해 가난한 수원 백성 위에 군림해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1%가 99%를 장악할 수 있기에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가 특정 상인 20호가 인삼을 독점하게 되면 나머지 상인들이 인삼 유통을 할 수 없고, 다섯째 서울의 특정 상인들을 대상으로 수원 시전 건립을 허가해줄 때 나머지 상인들이 소외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수원 시전 육성 정책은 독점 상인을 유치하는 것이므로 왕도정치의 근본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상인이 독점권 없이 자유롭게 장사
정조는 이병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불편한 여섯 가지의 진실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병모의 의견에 우의정 채제공 역시 동의를 했다. 비변사에서 제안한 화성 상업 육성법이 그대로 시행되어도 큰 문제가 없다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실제 존재하기에 철회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었다.
이에 수원부사 조심태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한양의 부상(富商)도 일부 받아들이지만 실제 수원의 상인들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수원에 거주하는 전체 백성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고 싶은 이들에게 조정에서 총 6만 냥을 지원해 시전을 설치하고 장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외부에서 대형 상인들이 온다고 해도 수원 출신들이 함께 장사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절충의 의견에 따라 수원은 새로운 상인 세력이 공존하게 되었다. 한양의 부상과 수원의 상인 그리고 전국 경향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특정의 독점권 없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든 자유롭게 상업 행위를 하다 보니 수원 지역의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이런 경제 변혁을 모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잘못된 정책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금난전권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혁을 하자고 대놓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었다. 금난전권을 혁파하자고 의견을 내는 순간 엄청난 폭풍이 몰려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상업 개혁을 준비하던 채제공은 신해년(1791, 정조 15)에 시전상인들이 도매[都?] 장사하는 법을 파하기를 청했다.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상인이 되고자 원하는 백성이 자유롭게 상업 행위를 한다면, 상인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전상인들의 원망은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다부진 결의를 했다.
악습과 구태 청산이 진정한 한국판 뉴딜
정조는 그 자리에서 여러 관료의 의견을 들었다. 재상과 판서들의 의견을 모두 들은 정조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신하들은 의견을 낼 수 있지만 결정은 국왕인 정조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정조가 지속적으로 지시하고 개혁하고자 한 일이었기 때문에 채제공의 제안은 정조의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조는 과감한 개혁을 선언하고 통공정책을 실시하기로 했다.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을 보면, 실제 시전상인들이 채제공에게 법을 제정하지 말라고 호소하면 집과 거리를 메우고 원망하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 정책을 밀어붙였고, 1년쯤 지나서 물화(物貨)가 모여들어 일용품이 날마다 넉넉해지니 백성은 크게 기뻐해, 비록 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일지라도 공의(公議)가 훌륭하였다고 했다.
결국 조선 건국 후 399년 만에 신해통공은 실시되었고, 백성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양민으로서 상인이 되어 돈을 버는 이도 생겨나고, 독점권이 사라져 물품의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정조와 그의 관료들이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그 시대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엄청난 경제적 위기의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이럴 때 잘못된 규제를 혁파하고 새롭고 창조적인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뉴딜이다. 단순히 환경적 측면에서만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잘못된 악습과 구태를 청산하고 모든 이들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한국판 뉴딜이다. 정조시대 개혁을 우리가 살피고 계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한국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