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을 넘어 만년 미래 내다본 ‘조선판 그린 뉴딜’

2020.11.30 최신호 보기
▶<조선의 임수>에 실려있는 경기 수원 노송지대 가로수 모습. 조선 정조가 선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던 능행로를 따라 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판 뉴딜은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대한민국 대전환 프로젝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29년부터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이 극심한 경기 침체에 빠지자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뉴딜로 일컫듯이, 여기에 빗대어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반 정책들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는 여러 이유로 나라 안팎에서 큰 혼란과 위기를 자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결단과 혁신 정책으로 위기를 위대한 도약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고 거북선과 수원화성으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 가깝게는 일관제철소 건설과 반도체 투자로 경제강국 코리아를 일궈냈다. 위기의 순간에 좌절을 이겨내고 생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전환에 도전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룬 역사적 혁신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한국판 뉴딜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본다 <편집자 주>

정조의 식목정책과 그린 뉴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고 조선 사회에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 바로 조선의 산과 들에서 나무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산림을 개간하는 화전(火田)의 영향도 있지만 국가의 토목과 건축 사업, 그리고 백성들이 사용하기 위한 무분별한 나무 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풍수적인 면과 함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나무를 공급받기 위해 서울 주변의 사산(四山)과 왕릉 또는 특별히 지정한 곳에서 나무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사산이란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을 말한다.
현종 대에는 형조에서 8개 조항의 금제조(禁制條)를, 한성부에서 6개 조항의 금제조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사산에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령에도 일반인들이 죽은 소나무를 베어가자 한성부로 하여금 순찰하게 해 좋은 재목이면 영선(營繕)에 사용하고, 재목이 못 되는 것이면 기와 가마에 쓰게 했다.
한편 산의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밭을 만드는 백성 때문에 물의 근원이 모두 끊어져 산에 나무가 무성하지 못했다. 이에 산에다 불 놓는 자를 죄로 다스리게 했다. 조정에서 금지한 곳의 나무를 베어가는 자는 엄중히 처벌했다. 그럼에도 인조 대에 사직단 내 소나무를 몰래 베어간 사람이 있기도 했다. 권력자들이 국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나무를 베기도 했다.
백성은 왕릉의 나무도 베어갔다. 왕릉의 나무 가운데 10그루 이상을 베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왕릉의 나무를 몰래 베기도 했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도 봉분 뒤쪽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가 민둥산이 되었다. 세종의 왕릉까지 베어갈 정도였으니 정말 나무가 귀하긴 귀한 시대였다. 그래서 조정은 금산정책 혹은 금송정책을 만들어 시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정조가 수원 일대에 심은 노송지대 가로수. 지금은 늙은 소나무 몇 그루만이 옛 자취로 남아 있다.│ 문화재청

금송정책 한계 뛰어넘어 식목정책 추진
효종 대에 온돌이 보급되고 나서부터 더욱 나무가 귀해졌다. 부엌의 아궁이에서 때는 불로 인해 밥 짓기와 따스한 방을 만들 수 있는 온돌은 주거 문화에는 매우 좋은 발명이었지만 산림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온 나라가 벌거숭이산이 되어갔다.
숙종 대에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송정책(禁松政策)을 실시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정이 나무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온돌의 맛에 익숙한 백성이 나무 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한여름 장마가 오면 고을 인근 산하에 나무가 없어 큰 물난리를 만나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조는 금송정책의 한계를 뛰어넘어 식목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기보다 나무를 많이 심어 산림을 푸르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시대를 읽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정조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일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경모궁은 오늘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일대다. 창경궁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곳으로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다.
정조가 처음 경모궁을 조성할 때 사방 산에 나무가 매우 듬성듬성했다. 그래서 정조는 관리들에게 매년 봄가을로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캐어다 심게 했다. 그 결과 몇 년 지나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사당의 면모가 더욱 엄숙하게 갖춰졌다.
나무를 심기 위해 전문가도 고용했다. 나무 심기만을 전담하는 관리인 식목직을 두었다. 일반 백성에게 식목직으로 임명해 강제로 나무를 심게 한 것이 아니라 매달 급여를 영구적으로 주어 나무를 심게 했다. 이전의 나무 심기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경모궁의 식목직 설치로 이후 사도세자의 묘소와 수원 신도시에 나무를 심으며 조선 식목정책의 혁신사업을 추진할 때도 식목직이란 전문가를 통해 진행시켰다. 뉴딜 정책에서 전문가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혁신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무를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군인들인 운목군과 나무를 심는 군인들인 식목군을 두어 안정된 급여를 주고 나무 심기에 전념하게 했다.

나무 총수 데이터 구축으로 산림 회복 꾀해
정조는 경모궁에 심은 나무 수가 얼마이고 죽은 나무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조사가 있어야 혹시라도 말라 죽은 나무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심은 나무의 총수와 살아 있는 나무의 총수를 항상 기록하게 했다. 이런 데이터의 구축이 산림을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관료들이 생각하지 않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정조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이고, 실제 나무의 나이는 식목정책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당시 경모궁에 심은 나무와 죽은 나무 그리고 어떤 나무가 심어졌는지 모두 조사해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이 바로 <경모궁의 식목실총(植木實總)>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정조는 이 책을 편찬하고 경모궁 도제조 서명선에게 서문을 짓도록 명했다. 그리고 사계절 초하루에 경모궁 관리들이 내용을 수정해서 정조에게 올리는 것으로 제도를 정했다.
이 <경모궁식목총안(景慕宮植木摠案)>이 완성되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선대왕께서 일찍이 육상궁(毓祥宮)에 납시어 좋은 나무를 심도록 명하고, ‘궁중에 언제나 부지런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울창하여 사당이 심오하고 엄숙한 위용을 갖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어린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었을 때 후인들이 필시 가리키고 어루만지면서 어떤 나무는 어느 때 심은 것이라고 하면서 크게 아끼고 안타까워하게 될 것이다. <시경>에 “뽕나무며 가래나무를 반드시 공경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다’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감히 잊지 못한다. 이제 경모궁에 나무를 심은 것은 바로 선대왕의 뜻을 이어받은 일단(一端)이다” 했다.
경모궁을 중심으로 나무를 심은 정조는 자신이 만든 시범도시 수원을 중심으로도 나무를 심었다. 1789년 7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도호부 화산으로 이전하고 신읍치를 팔달산 자락에 새로 조성했다.
정조는 첫 번째로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 일대에 본격적인 나무 심기를 했다. 더불어 팔달산 자락에 만든 화성행궁 후원과 팔달산에도 많은 나무를 심었다. 소나무, 뽕나무, 잣나무 등 목재로 사용될 수 있는 나무와 유실수를 적극적으로 심었다. 특히 뽕나무는 양잠의 효과와 더불어 군사용 활의 주재료이기도 했기에 더 많이 심었다.
탄력성이 강한 뽕나무는 대나무와 함께 활의 주재료였다. 수원신읍치의 북쪽에 대규모 뽕나무 단지를 만들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들어와 화성의 장안문 밖에 이르는 긴 마을에 뽕나무를 대거 심어 장관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이름하여 ‘관길야(觀吉野)’라고 했다. ‘좋은 기운이 가득 담긴 들판을 본다’라는 의미가 있는 땅이었다. 그 관길야를 수원 팔경의 하나로 정했다. 관길야에 가득한 뽕나무를 ‘길야관상(吉野觀桑)’이라 이름 붙여 수원 춘팔경의 하나로 정했다.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뽕나무 들판을 여가와 관광용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20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1년 전 대형 산불 피해를 입은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를 방문해 소나무를 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혁신 도시로 조성한 수원부터 식목 시작
정조는 자신의 친위 도시이자 혁신 도시로 조성한 수원에 우선으로 나무를 심고 수원 인근의 7개 고을인 광주(廣州)·용인·과천·진위·시흥·안산·남양에 나무 심기를 시작했다. 관료들과 시전 상인 등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묘목을 기증받았다.
1789년 7월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5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에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 잔치를 거행하고 그 관련된 내용을 차분히 기록하게 했다.
이때 정조는 갑자기 자신이 6년 동안 수원을 포함한 8개 고을에 심은 나무의 수가 궁금했다. 그래서 관원들에게 식목 장부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런데 관원들이 가져온 장부의 양이 너무 많았다. 도저히 숫자 파악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나무의 수를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간략하게 간추려 명백하게 작성하되 되도록 한 권을 넘기지 않게 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정약용은 어떻게 하면 간략한 식목 연표를 만들까 고민하다가 오늘날의 표와 유사한 형식을 고안했다. 그래서 한 장의 종이에 가로 12칸을 만들어 7년을 12칸에 배열하고, 세로 8칸을 만들어 8읍을 배열했다. 1칸마다 그 수를 기록하고 총수를 계산했다. 나무의 수는 놀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소나무·회화나무·상수리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를 모두 1200만 9712그루나 심었다. 오늘날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1000만 그루 이상을 심은 것이다. 이로써 수원과 주변 고을은 온통 나무가 가득했고, 풍요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정조는 아마도 상당히 흡족했을 것이다. 정약용의 보고에 대한 정조의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는 없다. 이후 정조는 계속해서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관료와 백성에게 나무 심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혁신적 사고가 새로운 경제 발전의 토대
“닥나무, 대나무, 뽕나무, 옻나무는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밑천인데 우리나라는 평소 이것이 풍부하게 생산된다. 다만 뜻있는 선비로서 백성과 나라에 마음을 두는 이가 없으니, 벌목이 매일같이 행해져도 재배하는 사람에 대해 들을 수가 없어 점차 처음만 못해지고 있다.
살림을 꾸려나가는 개인 가정에서도 10년 계획으로는 나무 심기만 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더구나 나라의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에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정조는 나무를 심는 것은 백년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이라고 했다. 정말 길게 내다보는 안목이었다.
문재인정부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 자연과 환경을 지키면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그린 뉴딜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는 거대한 인공물을 통하지 않고도 새로운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만든다. 조선의 산천에 나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던 시대에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무를 심은 정조의 행동이 그린 뉴딜이고, 이것이 바로 오늘 시대에 하고자 하는 그린 뉴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하나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잠시 주춤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만 끝내 성공하고야 만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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