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파’, 장지에 먹 분채, 162×130cm, 2015
일상이 무너진 요즘, 행복의 의미를 새삼 생각한다. 행복은 크기나 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빈도가 중요하다. 맑은 날 벼락 맞을 확률에 버금가는 로또 당첨처럼,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은 습관이다. 하루하루 맞닥트리는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 시나브로 변하는 계절의 경이로움.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깝게 매일 접하는 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껍데기로서 ‘하우스(House)’가 아닌 삶의 공간으로서 ‘홈(Home)’의 가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에서 경험하는 행복에 대한 기억은 결국 ‘고향’으로 귀결된다. 물리적 공간인 집이 아니라 심리적 안식처인 ‘고향’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다. 각박한 도시생활 속 현대인에게 고향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특히 예술가에게 고향이란 남다른 정서로 해석된다.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고향은 창작의 근원이자 중요한 주제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양화가 김선두의 작품이 좋은 예다. 김선두의 고향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과 득량만 사이 정남진(正南津) 근방의 작은 마을이다. 붉은색 땅과 옥색 바다가 어우러진,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 곳이다.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첫 장에 소개된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에서도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 곳이 장흥이다. 몇 년 전 장흥 이청준문학관에 갔을 때 “강진은 그저 길목이여라. 남도를 지대로 볼려거등 여 장흥까지 와야 한당께요…”라며 동네 자랑을 하던 문화해설사의 사람 좋은 표정이 떠오른다.
▶김선두, ‘행-장흥 기행’, 장지에 먹 분채, 60×90cm, 2006
영화 출연, 책 표지 그림으로도 유명세
김선두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장흥에서 자랐다. 그가 태어난 마을 어귀엔 잘생기고 큼지막한 소나무 두 그루가 여전히 서 있다. 부친이 지어주었다는 ‘이송(二松)’이란 호의 내력을 짐작하게 한다.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산동 오태학 교수, 일랑 이종상 두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김선두는 1984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미술계에 등장했다. 이후 특유의 힘찬 필선(筆線)을 바탕으로 수묵과 채색을 넘나들며 독자적 화법을 확립했다. 교육자로서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그림의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편 김선두라는 이름이 미술계뿐 아니라 대중에 알려진 계기는 영화다. 조선시대 괴짜화가 오원 장승업 일대기를 그린 임권택 감독의 2002년 작품 <취화선>에 깜짝 출연했기 때문이다. 김선두는 주연배우 최민식의 대역으로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장면을 완벽히 재연했다. 일필휘지로 붓을 놀리는 영화 속 장면은 장승업이 환생한 듯 놀라운 솜씨였다. 김선두였기에 가능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명장면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선두는 여러 언론매체에서 ‘화제의 인물’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어서 2007년 또 다른 기회로 유명세를 탔다. 이번엔 소설책 때문.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덩달아 초판본 책 표지에 실린 김선두 그림이 다시 한번 널리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가 김선두의 작업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소설가 고(故) 이청준 선생이다. 이청준 선생 고향도 장흥이다. 이청준 선생 타계 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 <이청준 전집>의 모든 책 표지가 김선두의 그림으로 장식된 것만 봐도 두 선후배 예술가의 인연이 얼마나 깊고 각별한지 헤아려진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청준의 소설은 임권택 감독을 통해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서편제> <축제> <선학동 나그네> 등이 대표적이다. 임 감독의 100번째 작품 <천년학> 원작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다. 양 날개를 활짝 펼친 학 모양 지세를 보여주는 선학동은 실제로 장흥에 현존하는 지명이고 <천년학> 역시 그곳에서 촬영됐다. 이처럼 장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이청준 못지않게 김선두 그림에서도 고향 풍경은 자주 등장한다.
▶김선두, ‘행-서편제’, 장지에 분채, 160×120cm, 2007
인물과 도시에서 자연과 풍경으로
김선두의 초기작은 인물화 중심이었다. 서커스단에서 외줄을 타는 곡예사와 광대, 술 취한 포장마차 손님, 아파트 경비원, 피곤에 지친 지하철 승객…. 청년 시절 김선두가 주목한 대상은 주목받지 못하는 소시민,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었다. 인물과 도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차츰 자연과 풍경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그 구체적 소재를 고향 땅에서 찾게 됐다. 야트막한 언덕처럼 온순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황토 밭두렁, 거기서 움터 자라는 풀의 생명력, 그리고 호수처럼 잔잔하고 포근한 옥색 바다와 쪽빛 하늘. 남녘 땅 풍경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선두 그림의 내용적 근원은 고향이다. 형식 면에서는 전통 수묵화의 맥을 이으며 그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두툼한 질감의 장지 위에 물감을 여러 겹으로 채색하고, 때론 종이를 칼로 오려내는 등 혁신적인 제작 기법을 보여주는 김선두의 그림은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이다. 더불어 사적 경험에서 발아된 미의식을 바탕으로 보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