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역균형 뉴딜은 정조의 화성 건설이다. 수원 화성의 팔달문│수원화성박물관
한국판 뉴딜은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대한민국 대전환 프로젝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29년부터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이 극심한 경기 침체에 빠지자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경제정책을 뉴딜로 일컫듯이, 여기에 빗대어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반 정책들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는 여러 이유로 나라 안팎에서 큰 혼란과 위기를 자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결단과 혁신 정책으로 위기를 위대한 도약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고 거북선과 수원화성으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 가깝게는 일관제철소 건설과 반도체 투자로 ‘경제강국 코리아’를 일궈냈다. 위기의 순간에 좌절을 극복하고 생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전환에 도전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룬 역사적 혁신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한국판 뉴딜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새긴다. <편집자 주>
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역균형 뉴딜은 바로 정조의 화성(華城) 건설이다. 새로운 혁신도시 건설과 함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일자리를 창출한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비견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화성을 정조가 수원으로 천도하기 위해 만든 성곽이자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담아 축조한 기념물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국가 최고의 역점 사업을 단순히 효심 때문에 진행할 수 있겠는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것은 좀 더 깊은 의도가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위한 배후 도시로서 위상을 갖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의 혁신도시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가난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화성을 단순히 성곽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화성은 도시 자체이자 성곽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7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도호부의 부아(府衙)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 일대에 새롭게 조성했다. 그래서 수원을 ‘동양 최초의 신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 1월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정3품 부사가 임명되는 도호부에서 정2품 이상의 정경급 관료가 임명되는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리고 도시 이름 역시 ‘수원(水原)’에서 ‘화성(華城)’으로 변경했다. 이듬해인 1794년 1월부터 팔달산 일대의 신읍치를 보호하는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했고, 성곽 이름 역시 ‘화성’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화성은 단순히 성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성 건설을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9월까지 성곽 축조 공사로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에서 정조대왕이 효 행사를 마친 뒤 말에 오르고 있다.│한겨레
“최대의 사명이자 역사적 사업”
정조가 화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화(華)’자에 ‘부(富)’와 ‘수(壽)’, ‘다남자(多男子)’ 같은 의미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화성에 거주하는 백성 모두가 부유해지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인구가 번성해 대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는 것이다.
정조는 성역과 신도시 건설을 주관할 총리대신에는 초대 유수를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을, 그리고 수원부사를 거쳐 훈련대장으로 있던 조심태를 제3대 수원유수 겸 감동당상에 임명해 성역을 전담케 했다. 정조는 경연 시간에 동석한 채제공 등 신하들에게 “화성 성역이야말로 당대인들의 온갖 경륜을 투영해 이룩해야 할 최대의 사명이자 역사적 사업”이라며 상기시키곤 했다.
1789년 수원 신읍치 이전부터 구상하고 진행하던 화성 성역은 1794년(정조 18) 1월 15일 정조의 명령에 따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화성 성역이 선침을 위한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라며 화성 건설의 숨은 뜻을 온 신하와 백성에게 나타냈다. 정조는 화성을 주나라의 기읍이나 한나라의 관중과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삼보체제(三輔體制)에 따라 화성을 수도 한양과 광주와 함께 삼보체제의 도시로 선언하고, 더불어 수도 한양에 이은 조선의 ‘제2 도시’로 설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축성과 동시에 화성행궁을 대대적으로 중축했으며, 또 도심부를 관통하는 하천(버드내)의 준설과 가로의 정비도 함께 진행됐다. 성 밖에는 저수지가 조성됐으며 서울로 연결되는 신작로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반시설 공사와 함께 역촌(驛村) 이전, 시장 건설 등 화성 신도시가 교통과 상품의 거점이 되기 위한 작업이 이뤄졌다. 이런 종합적인 도시 공사가 화성 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으며, 이 작업을 통해 화성은 비로소 하나의 대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전북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의 서남권 해상풍력 실증단지│한겨레
국방개혁의 요처로 육성
정조가 수원을 정국 구상의 핵심 거점으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가 크게 작용했다. 첫째, 수원이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상 요지라는 점이다. 수원에서 군사 방비를 완벽히 한다면 삼남의 든든한 배후지를 바탕으로 서울 이북에서 적이 출몰했을 때에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지역이었다. 둘째, 수원은 교통상의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단순한 군사거점 이상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삼도(下三道·충청, 전라, 경상도)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군사적으로 주요한 거점이 되며, 향후 경제적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수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사력의 중추를 집결시키고 왕의 거처인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조는 수원에 자신의 친위부대를 반드시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다.
1790년 부사직 강유와 1791년(정조 15) 신기경은 수원신읍치에 성곽을 축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광해군 시절 조선의 5대 군사 요충지의 하나로 평가되던 독성산성과 마주 대하는 수원읍치의 성곽을 쌓는 것이 외적 방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즉 수원신읍치의 성곽은 단순히 읍성의 개념이 아니라 한양과 경기 지역을 보호하는 중요한 군사기지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정조는 1793년(정조 17) 1월 12일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하고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을 설치해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壯勇外使)를 겸직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지방의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 도시로 거듭나게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신설하면서 수원이 자신을 비롯한 왕실의 고향과 같이 중요한 곳이기에 지위를 격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조는 신설된 화성유수 및 장용외사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5품 판관이 화성유수를 보좌하게 했다. 이는 기존 도시와 달리 화성이 자신의 친위 도시이자 조선의 국방상 요충지였기에 파격적인 예우를 한 것이다.
상업 제도의 혁신 기반도시
군사력 배양과 함께 정조가 화성 신도시 조성에서 공을 들인 부분은 바로 대도시를 만들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고 이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수원에 한양의 육의전과 같은 시전을 설치하고 대부상들이 이를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의 의중을 알고 있던 채제공은 신읍치 설치 다음 해인 1790년(정조 14)에 신도시 번영 계획을 제안했다. 수원부의 상업 진흥을 위해 전방(廛房)의 상설화와 함께 8도의 부호(富戶)와 부상(富商)들을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해 부가(富家)를 형성하고, 정부지원과 민간자본의 유치를 통해 수원 지역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정조와 신료들의 수원 육성책을 종합해 혁신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한양의 부상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수원 상인들을 육성하기 위해 수원 백성 중 상업에 종사하고 싶은 이들에게 조정에서 총 6만 냥을 지원, 시전을 설치하고 장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성이 많이 거주하던 5칸에서 7칸 정도의 집 한 채 값이 20~30냥이었으니 6만 냥은 정말 대단히 큰돈이었다.
이러한 의견을 정조가 받아들이면서 수원에는 한양의 부상과 수원의 상인,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특정의 독점권 없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조선의 무역을 주름잡던 역관 상인 일부가 수원에 정착해 인삼과 모자를 유통하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는데, 이 시장이 바로 조선의 3대 시장인 화성 성내외 시장이다.
수원에서 자유 상업의 추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조와 채제공은 독점권을 가진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혁파하는 신해통공을 1791년(정조 15)에 실시했다. 이로써 조선 경제구조의 대대적인 혁신이 이루어졌고, 도시 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었고, 상업의 발전이 촉진돼갔다.
저수 농법과 둔전 경영의 농업개혁 추진
정조는 1789년 7월 수원부 읍치를 이전하고 수원 지역을 농업 개혁의 시범 지역으로 삼고자 했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말처럼 농업을 기반으로 운영되던 조선 사회에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일은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정조는 가뭄을 극복하고 농사를 원활하게 짓기 위해 저수지 조성을 제안했다. 저수지를 파고 그 주위에 대규모 국영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농토 없는 백성이 마음껏 농사를 짓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화성성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5년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저수지가 있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에 농사를 짓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최초의 저수지가 만석거라고 하는 학계 의견을 보면 정조의 저수지 건설은 혁신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만석거를 축조한 그해에도 조선 땅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적인 흉작에도 만석거를 중심으로 대규모로 조성된 둔전인 ‘대유둔(大有屯)’만은 대풍작을 이루었다. 정조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대유둔이 저수 농법으로 성공을 거두자 화성의 백성들은 추가적인 저수지 건설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조는 1798년 현륭원 앞에 ‘만년제(萬年堤)’라는 저수지를 추가로 만들었다. 만석거와 만년제 축조를 통해 정조는 저수지를 이용한 선진 농법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게 됐고, 서호(西湖)로 더 잘 알려진 ‘축만제(祝萬堤)’까지 만들게 됐다. 앞선 사례처럼 정조는 이곳에 ‘축만둔(祝萬屯)’ 혹은 ‘서둔(西屯)’이라 불리는 둔전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더욱더 농사를 장려했다. 당시엔 단순히 제방을 쌓아 물을 저장한 것이 아니라 물길을 조성하고 그 물길을 따라 논을 배치해 극심한 가뭄에도 논에 물을 쉽게 대어줄 수 있도록 저수지를 설계했다. 또한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제방 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더위에 지친 백성의 쉼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농업개혁 모델은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정조의 화성 건설은 농업, 상업, 국방제도의 개혁을 통한 혁신도시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자신의 왕권 강화는 물론, 화성행궁을 대대적으로 확대해 향후 양경체제로 운영될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사실 이것이야말로 화성 건설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판 뉴딜은 바로 이런 종합적인 계획을 가지고 전 국민의 지지를 얻으며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