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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가까이,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1년 동안 쓴 다이어리의 월별 기록을 넘겨보곤 했다. 1월부터 한 장씩 훑어보면 한 해의 시작과 한 달의 일정, 상반기와 하반기의 흐름 같은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다이어리에 중요하게 남겨두는 기록은 사람이나 업무 관련 약속과 해야 할 일에 대한 메모, 하루를 마무리하는 간단한 감상이다. 그걸 짚어가다 보면 어떤 하루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는데도 다시 생생히 살아나고, 어떤 하루는 특별한 인상이나 느낌 없이 일상이라는 범주로 묶인다.
한 달, 30여 일은 대체로 짤막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지만 가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칸도 눈에 띈다. 그럴 때면 전날과 다음 날의 기록에 의지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빈 하루를 채우려 애쓰지만 대체로 실패하고 만다. 빈칸과 기억나지 않는 날이 많은 달은 소설 마감이나 책 발간처럼 중요한 일이 겹쳐서 바쁘거나 판에 박힌 일상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은 없겠지만, 기록되지 않은 날은 지워진 날 같아 짤막한 문장이라도 적어두자고 다짐하게 된다.
2020년에는 사람 만나는 약속 옆에 대체로 취소, 연기 같은 단어가 따라붙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나 수업 개강도 몇 달씩 연기되었다가 진행되었다. 미뤘다가 만나게 된 사람도 있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한 해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교 친구인 Y와는 1년에 한 번, 그의 여름휴가 때 만나곤 했다. 10대 때는 거의 매일 만났고, 20대 때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누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회사에 다니고… 삶의 어떤 지점들을 지나며 만나는 간격이 길어지긴 했지만 언제 만나도 엊그제 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일하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사는 곳이 멀어지면서 Y와는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여름휴가를 받으면 그중의 하루는 나를 위해 비워두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사는 곳의 중간쯤에서 만나 이른 점심부터 커피와 디저트까지 먹으며 1년 동안의 변화와 여전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1년 동안 생긴 서로의 주름과 흰머리를 확인하며, 도대체 왜 늙지를 않는 거냐는 농담을 주고받았고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1년에 한 번뿐이므로 지난 생일 선물을 건네기도 하고 나온 책에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은 아팠다가 그만그만해지셨고, 아이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친구의 취미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친구와 나의 1년은 1월에서 12월이 아니라 ‘여름에서 여름으로’라는 새로운 기준을 갖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나에게는 여름에 그 친구와 보내는 하루가 특별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매년 있었지만 2020년에는 없는 것이 바로 그 친구와 만남이다. 이런 시절에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언제 다시 만날까, 약속을 잡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코로나19 물결에 실려가는 동안 잊고 지나가 버렸다. 내가 아이를 낳고 난 뒤에는 ‘1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드네’ 하면서 그래도 ‘우리 1년에 한 번은 꼭 만나자’고 했는데, 2020년은 ‘좀 더 좋아지면 보자’는 말과 함께 어영부영 겨울이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1년에 한 번밖에 못 보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정신없이 살 때는 여름이 이토록 빨리 돌아온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1년에 한 번은 꼭 보자고 약속했다. 그 말에 친구는 ‘그래, 우리 매년 만나도 앞으로 50번도 못 만나’라고 하며 웃었다. 몇 년 전 여름이었고 그때는 같이 웃으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나게 될까”라고 얘기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남겨놓고 지난 1년의 기록을 넘겨보고 있자니 잃어버린 2020년 친구와 만남이 유독 아프게 다가온다.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