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컨스터블, ‘건초 수레(The Hay Wain)’, 캔버스에 유화, 130.2×185.4cm, 1821,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풍경화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이 변함없이 사랑하는 그림이다. 풍경화는 17세기 들어 독립적인 회화 장르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이후 19세기 초 영국에서 만개(滿開)의 결실을 거두며 풍경화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이 시기, 영국 미술계에는 두 명의 빼어난 풍경화가가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와 존 컨스터블(1776~1837), 한 살 터울의 두 화가는 영국 풍경화의 쌍두마차로 19세기 서양미술사를 빛낸 거장으로 나란히 등재돼 있다. 두 화가는 비슷한 연배에다 풍경화의 위대성을 탁월하게 구현한 대가들이라는 점에서 용호상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풍경을 바라보는 철학과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터너는 성난 파도와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뒤덮인 거친 바다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터너의 그림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 역동적인 느낌이 압권이다. 붓 터치가 거칠고 빨라 윤곽이 흐릿하고 형태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주제에 대한 의미 전달이 확실하고, 느낌도 강렬하고 뚜렷하다. 기운생동의 백미, 그 자체다.
반면 컨스터블의 그림 속 풍경은 정적이다. 컨스터블은 평생 영국 남부지방의 전원 풍경에 심취했다. 그의 고향도 영국 동남부 서퍽주의 고즈넉한 평원지역인 버골트다.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목가적이고 평화롭고 고요한 정취가 흘러넘친다. 그의 그림을 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고,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에 젖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화 같은 전원 풍경 그린 풍경화의 상징
컨스터블이 1821년에 제작한 ‘건초 수레’는 영국 국민이 가장 그리워한다는 동화 같은 전원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컨스터블의 대표작이자 19세기 영국 풍경화의 상징과도 같은 그림이다. 그림의 배경은 컨스터블의 고향인 스투어 강변의 시골 마을이다. 1776년 이곳에서 태어난 컨스터블은 제분업에 종사하던 지역 유지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유복한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으나 버골트 일대에서 활동하던 지역 화가들과 교류에서 발동된 예술적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컨스터블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컨스터블은 1799년, 23세의 늦은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입학하면서 화가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컨스터블의 고향 마을은 울창한 숲과 목초지가 많은 전형적인 영농 마을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단 하루도 같은 날씨가 없을 정도로 자연과 기후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고향의 경치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컨스터블은 실제로 평생 태어나고 자란 스투어강 일대의 풍경을 찾고 또 찾았다. 그의 풍경화에 실제 풍경의 아우라가 고스란히 담긴 이유다.
1829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37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건초 수레’가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1824년 파리 살롱전을 통해서다. 당시 프랑스 제도권 미술 최고 권위의 등용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살롱전에 ‘건초 수레’가 출품되자, 파리 미술계가 열광했다. 컨스터블이 물감으로 표현한 풍경은 그림이라기보다,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겼을 때처럼 한없이 포근하고 따뜻하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볼 수 없던 획기적인 풍경화였다.
파리 미술계를 흥분시킨 이유는 또 있다. 모든 사물은 빛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눈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대기(大氣),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기체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마찬가지다. 자연 그대로의 날 것의 색이 ‘건초 수레’ 그림에서 확인되자, 영국에서 특별히 명성이 높지는 않았던 컨스터블은 이 전시를 발판으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특히 살롱전에 같이 참여한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반응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정겨움과 함께 목가적 정취 한껏 돋아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킨 ‘건초 수레’는 컨스터블이 자신의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영국식 전원 풍경화다. 화면 왼쪽 위, 우리와 가까운 곳에 짙은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몰고 올 듯 심술궂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른편 저 멀리 뒤로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 대조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림 왼편 농가 뒤에서 가운데까지 울창한 숲과 숲이 만들어낸 넉넉한 그늘은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그 앞으로 얕은 강물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시끄러운 소음의 여지가 끼어들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한가롭고 평온한 정경의 교과서처럼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강 한복판에 그림의 제목인 건초 수레가 보이는데, 정겨움과 함께 목가적인 정취를 한껏 돋운다.
그런데 건초 수레를 끄는 말들과 농부 둘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강 뒤, 드넓은 들판 너머로 건초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는 일꾼들 모습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된다. 두 농부는 말린 건초를 실으러 강을 건너다가 잠시 길을 멈추고 수레를 세척하며 잡담을 나누는 중이다. 농가 바로 오른쪽, 강가에서 한 아낙네가 물을 긷고 있는 것이나, 오른쪽 아래 끄트머리에 타고 온 나룻배를 세워둔 채 낚시놀이에 한창인 개구쟁이 아이의 장난기 섞인 몸짓도 고향의 정취에서 피어오르는 흥을 돋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 가지 더, 그림 아래쪽 강가에 서서 건초 수레 쪽을 쳐다보고 있는 강아지.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이라 무료하던 참에 갑자기 등장한 농부들이 반가운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그림 속 모든 풍경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꾸밈이라고는 없다. 바쁜 세상사에 찌든 도시인들의 근심 걱정을 씻은 듯이 치유해주는 청량제 같은 그림이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영국인들의 소박한 꿈이 예쁘게 담겨 있는 걸작이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