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시범단이 조선 무사들의 맨손 격투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자객이 야음을 틈타 습격했다. 자객이 노린 목숨은 바로 정조(1752~1800)였다. 얼마 전 왕위에 오른 정조를 죽이기 위해 자객 몇 명이 궁궐 지붕을 타고 침입하다 왕 호위병들에게 발각됐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이미 세손 시절부터 몇 차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당쟁의 여파였다. 정조는 그때 받은 충격으로 한 번도 의대를 벗고 잠을 이룬 적이 없고, 늘 칼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놀랍게도 자객 중엔 왕의 호위군관이 포함돼 있었다. 조사 결과 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군인 150명 가운데 3분의 1인 50명이 연루됐다.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정조는 왕권을 확립해야 했다. 호위를 담당하는 정예부대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병사들의 무예를 지도하기 위한 무예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장용영에 선발된 무사들은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화포, 총포, 활쏘기 외에도 창검 무예를 별도로 익혔다. 그때 만들어진 무예서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의 학자 박제가와 이덕무, 그리고 장용영 최고 무관 백동수의 주도 아래 편찬됐다.
세 사람 모두 서얼 신분이었다. 정조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중용했다. 실학파 학자로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덕무와 박제가가 글을 담당했고, 조선을 대표하는 무사였던 백동수가 실기를 맡았다. 여기에 도화서의 화원들이 무예 동작을 세세히 그렸다.
▶최형국 시범단장의 지휘봉을 든 손 모습
▶등나무 줄기로 만든 방패인 등패를 한 손에 들고 칼을 휘두른다.
조선의 무예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
무사 백동수는 대대로 장수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종 때 무관을 지낸 충장공 백시구의 후손이다. 백동수는 당대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 조선 검법을 전수받았다. 김체건이 숙종 앞에서 바닥에 재를 뿌리고 검술을 시연했는데,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김광택은 영조가 세자 시절 호위무사를 지냈다. 백동수는 단학으로 내공을 쌓고, 부상에 대비해 의술까지 익혔다. 무과에 급제했으나 제대로 벼슬을 얻지 못하다, 창검의 1인자로 인정받아 45세 늦은 나이에 장용영에 합류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육상전에 무력하게 패했던 선조는 명나라 군사의 무예를 참고해 검과 창 등 6기의 무예를 수록한 <무예제보>를 급히 편찬했다. 궁술 위주의 무예를 중시했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예를 연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것이다.
무예를 좋아했던 사도세자는 <무예제보> 6기의 무예에 12기의 무예를 더한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여기에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무예 등 6기를 더해 24반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18가지 보병무예는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이다.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인 조선군의 공식 무예서가 탄생한 것이다. 한자를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한글로 만들어진 언해본도 제작했다. 군사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무예를 익히고 무과에 급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사라진 조선의 무예를 현대에 복원하는 중요한 사료가 됐다.
▶무예시범단원이 칼로 짚단을 베고 있다.
▶무예시범단이 칼 연무를 보여주고 있다.
수원 화성과 무예가 만나 관광자원으로
<무예도보통지>는 임동규(1939~2020) 선생의 노력으로 현대에 와서 부활했다. 유신정권에서 10년간 옥살이하며 감방에서 독학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익히며 ‘빗자루 도사’로 불린 임 선생은 출옥 후 광주 용진산 자락에서 ‘경당’을 열어 무술을 전수하고 제자들을 육성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통혁당 재건 기도 사건’과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조선 무술로 되살렸다. ‘경당’은 한때 대학가 등에 400여 개의 동아리가 생길 정도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최형국(44·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 씨다. 최 씨는 수원 화성행궁에서 매일 무예도보통지 무예를 시범 보인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융릉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며 축성한 왕실의 행궁터다. 5.7㎞의 성곽에 길게 이어진다.
최 씨의 연출로 진행되는 시범단의 무예 시범은 조선 무사의 용맹함과 민첩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시민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상품이 됐다.
최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교에서 그보다 키가 작은 학생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싸움을 하면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 탈춤을 배웠다. 한민족 전통문화에 끌렸다. 탈춤을 추다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수업에 들어가고, 짚신을 신고 다녔다. 한민족 전통 무술인 택견과 활쏘기를 익혔다. ‘경당’에 인연이 닿았다. 칼로 하는 무예 10가지, 창이나 봉으로 하는 무예 7가지, 맨손 권법에 말을 타고 하는 무예 6가지 등 모두 24가지 무예를 담은 <무예도보통지>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가 살던 수원에는 수원 화성이 있고, 그가 무예 24기를 수련한 곳은 바로 화성을 지키는 장용영 군사들이 머물던 곳. 화성이라는 성곽에 무예 24기라는 전통 콘텐츠가 결합해 관광자원이 됐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 식전 행사에 직접 연출한 무예 24기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고, 대학원 석사 논문으로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을 썼다. 그가 지휘하는 수원시 무예시범단의 단원 1인당 갑옷과 전통 무기 등을 구비하는 데 거의 1000만 원이 든다. 그는 2011년에 박사 논문 ‘조선 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를 썼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마상무예를 연구했다. 역사학에서 무예사로 박사학위를 받기는 그가 처음이다.
▶최형국 씨는 고증을 통해 조선시대 무사들의 복장을 재현했다.
▶조선 무사들의 격렬한 육박전 시범
“언젠가 남북이 함께 무예 시범을”
이제 곧 그가 직접 번역한 <무예도보통지>가 발간된다. 그는 조선이 문인을 숭상하고 무인을 홀대한 유약한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시선이라고 비판한다. “무관은 문관과 함께 조선시대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습니다. 양반은 무반과 문반으로 구성됩니다. 일제가 조선의 정신적 흐름과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는 조선을 미개하고, 무를 천시하고, 당쟁만 일삼는 민족으로 낙인찍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역사가 외세의 간섭과 압력으로 인해 수동적으로 이뤄졌다고 꾸미기 위해 만든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무사들이 익힌 ‘신보수검’을 설명한다. 신(身)은 몸으로 하는 맨손 무예로, 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육체의 한계를 깨닫는다. 다음은 보(步). 몸을 안정적으로 이동시키는 보법을 배우고, 기본 발차기를 익힌다. 수(手)는 권법을 포함해 각종 무기를 다루기 위해선 손을 잘 써야 한다. 그다음이 검(劒)이다. 칼뿐 아니라 상황에 맞는 다양한 무기를 다뤄야 한다.
3년 전 <무예도보통지>는 북한의 등재 신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선정됐다. 최 씨가 크게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복원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연결고리인 탓이다.
“언젠가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조선 무예를 남북한이 함께 시범 보일 날이 올 것입니다.”
조선 무사 백동수의 결기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