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 72.5×60cm, 2010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엄청난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 말이다. 이번엔 제주도 서귀포에 사는 화가 이왈종의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미국 여행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됐다. 사소한 경험에서 출발한 연상 작용이 작은 ‘나비효과’처럼 결국 제주도와 이왈종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사연은 이렇다.
요즘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좀이 쑤시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렇다. 며칠 전, 책 소개하는 EBS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던 중 귀를 쫑긋 세우게 됐다. 남자 셋이서 자동차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겪은 좌충우돌 여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근처 대형 서점으로 들어갔다. 신간 코너에서 그 책을 찾았다. 찜통에서 갓 나온 만두처럼 따끈따끈한 것 같았다.
책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롭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필자들의 맛깔난 글솜씨에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책의 마지막 쪽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여행으로 삶이 채워지기보다는 삶이 여행 같아지기를….” 이 대목만 보면 평범한 여행 후일담 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제주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 187×250cm, 2013
가을, 청량한 제주 바람이 그리울 때
그런데 이 책 내용은 범상치 않다. 제목부터 강렬하고 예사롭지 않다. <어젯날 철천지원수의 땅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그렇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청년들이다.(여행은 세 명이 함께했지만 글은 두 사람이 썼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들의 현재 상황은 제각기다.
셋 중 나이가 가장 많고 한국에 가장 먼저 정착한 주성하는 <동아일보> 기자로 13년간 근무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북한 전문 언론인이자 저술가, 유튜버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북한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막내 조의성은 한국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다. 프리랜서 작가 활동도 한다.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으로 두 차례 미국 생활을 했다. 마지막 한 명은 탈북 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유학했다. 지금은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미국 이름은 ‘오스틴’, 휴스턴에 있는 큰 기업에 다니고 있다. 이들이 미국 여행을 한 시기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딱 1년 전인 2018년 12월부터 2019년 1월이었다. 세 사람의 특별한 ‘아메리카 방랑기’를 읽으며 여행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미국은커녕 가까운 나라 여행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아닌가? 머릿속으로 여행을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궁리를 하던 중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해외여행(?)지는 결국 제주도로 귀결됐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왈종 작가의 그림을 떠올리게 됐다. 왈종미술관이 자리 잡은 정방폭포 주변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선하다. 당장에라도 제주도로 떠나고 싶다. 제주도엔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볼거리가 즐비하다.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요즘, 청량한 제주의 바람이 어느 때보다 그립다.
▶‘제주 생활의 중도’, 장지에 혼합재료, 187×250cm, 2013
그림으로 대신하는 제주도 여행
이왈종 작가가 제주에 정착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한 이왈종은 중앙대학교와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추계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도시생활과 창작활동 사이에서 괴리를 겪었다. 결국 교수직을 과감히 내던지고 홀연히 서울을 떠났다. 그가 찾은 곳은 아무 연고 없는 제주도.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탈북민들의 절박한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작가로서 예술을 위한 과감한 결단은 흡사 ‘자발적 유배’와 같았다. 이때가 1990년, 몇 년간 제주 곳곳에서 자연을 만끽하던 이왈종은 1997년 서귀포 정방폭포 바로 옆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그리고 2013년, 같은 자리에 지금의 ‘왈종미술관’을 건립했다. 자신의 다양한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전시공간과 실제 생활공간이 어우러진 왈종미술관은 그의 예술적 성취가 응집된 결정체다.
이왈종의 그림은 어렵지 않다. 무겁거나 심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지나치게 장식적이지만도 않다. 전통 동양화에서 출발해 고유한 조형 어법을 완성한 그의 그림은 전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만족시킨 경우로 평가받는다. 남녀노소는 물론 미술 전문가에게서도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물다. 이른바 전문성과 대중성,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작품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성취는 국내 주류 상업 화랑에서 개인전이나 여러 미술 전람회에서 활발히 거래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판화작품도 매우 인기가 높다. 작품 제목이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인 것처럼 그의 그림은 평화로운 제주의 자연과 소소한 일상이 어우러진 풍경화다. 두툼한 한지 위에 그려진 소재는 평범하고 익숙하고 친근하다. 순수한 동심으로 구현된 인물과 집, 나무와 물고기, 새, 꽃 등은 시대와 나이를 초월한 행복의 상징이다. 동양화에서 보기 쉽지 않은 ‘골프’ 관련 이미지나 왈종미술관 ‘19금’ 전시공간에서 볼 수 있는 선정적인 작품은 색다른 감상의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