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요즘 휴대전화는 예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일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휴대전화 하나로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사진도 찍는다. 과거에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건이 필요했는지 생각해보면 휴대전화는 정말 놀라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계획을 세우거나 일정을 확인할 때도 우리는 휴대전화의 날짜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한다. 언뜻 보면 날짜 앱은 벽에 걸려 있는 종이 달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 날짜 앱은 다른 어떤 앱보다 신기하고 특별한 앱이다.
얼마 전에 나는 개인적인 기념일을 확인하기 위해 식탁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밖의 날씨는 꾸물거렸고 금세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집 안에 있어야 했던 여덟 살짜리 아들은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놀아달라고 졸라댔다. 보드게임을 하고 칼싸움을 하고 다양한 체육 활동을 한 뒤인데도 그랬다. 아들은 총싸움을 하자고 했고 나는 총싸움을 하면 그다음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쉰 후에 총싸움하자고 말한 뒤 식탁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기념일을 확인했다.
날짜 앱이 종이 달력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종이 달력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 달력의 정보 단위는 1년이지만 날짜 앱은 훨씬 넓은 폭의 정보를 보여준다. 개인적인 기념일은 연말이었고 나는 휴대전화를 조작하다가 실수로 날짜를 너무 많이 넘겨버렸다. 지금보다 2년쯤 뒤인 것 같았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달이 넘어가거나 연도가 바뀐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럴 때 보통 ‘이때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2년 후의 달력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달력을 좀 더 넘겨보고 싶어졌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엄지손가락을 크게 두 번 움직이자 날짜 앱 속에서는 20년 정도가 흘렀다. 이때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지만 아까와는 많이 달랐다. 2년 후가 20년 후로 바뀌자 전혀 다른 항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여전히 건강할까? 20년 후면 아들은 스물여덟 살이 된다. 군대 제대하고 학교를 졸업했을 테고, 어쩌면 결혼을 했거나 직장에 다닐지도 모른다. 아무튼 20년 후는 짐작과 계획이 통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엄지손가락을 몇 번 더 움직여서 달력을 넘겼다. 50년 후의 달력이 나오고 100년 후 달력이 나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 100년 후 달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없는 연도와 날짜들을 본다는 것은 정말 낯설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100년 후에도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일 테고, 5월 5일에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꺼내놓을 테고, 2월 14일이나 3월 14일이면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할 것이다. 100년 후 달력을 보면서 나는 내가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들이 스펀지 총알이 나가는 총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100년 후면 아들은 백여덟 살이다. 많은 일을 겪었을 테고 많은 사람을 사랑했을 테고 많은 시간을 나 없이 보냈을 것이다. 총싸움을 하면 그다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지만 나는 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낮은 포복을 하기 시작했다. 100년 후의 달력을 보는 동안 든 생각이 있다. 내가 가진 시간은 많지 않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거나 지질학적인 시간과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열심히 살고 싶고, 열심히 산다는 것은 열심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아들과 총싸움을 하고 풍선으로 배드민턴을 친 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칼싸움을 한 번 더 했다. 아들은 땀을 흘리면서도 많이 웃었고 덕분에 나도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강태식_ 소설가. 2012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 <굿바이 동물원> <두 얼굴의 사나이> <리의 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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