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뉴딜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기 회복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대한민국 대전환 프로젝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극심한 경기 침체에 빠지자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경제 정책을 뉴딜로 일컫듯이, 여기에 빗대어 코로나19로 경기가 침체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는 여러 이유로 나라 안팎에서 큰 혼란과 위기를 겪은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결단과 혁신 정책을 통해 위기를 위대한 도약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고 거북선과 수원화성으로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가깝게는 일관 제철소 건설과 반도체 투자로 ‘경제강국 코리아’를 일궈냈다. 위기의 순간에 좌절을 이겨내고 생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다시 한번 대한민국 대전환에 도전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역사적 혁신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대한민국 대전환으로서 한국판 뉴딜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본다. <편집자 주>
세종의 한글 창제와 한국판 뉴딜
정부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선도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한국판 뉴딜 정책을 발표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감염병 이후 우리나라가 새롭게 거듭나 국제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힘찬 의지다. 여기에서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재조명해 봄으로써, 한국판 뉴딜 정책 선언과 연결지어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결정이 한국판 뉴딜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1271년 원나라를 개국한 임금 쿠빌라이칸은 칭기즈칸의 손자로, 중국의 문명과 역사를 배우기 위해 파스파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가르쳤다. 한문을 잘 모르는 몽골족이 중국문화를 쉽게 배워 원나라의 문화를 융성토록 하기 위해 혁신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1368년 명나라를 세운 황제 주원장은 97년 동안 치욕스런 식민지배를 한 원나라의 문화와 글자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대명률’이라는 새로운 법을 제정한 뒤, ‘홍무정운’이라는 표준 한자 운서를 반포해 수많은 소수민족과 지방 사투리로 혼란스런 거대 중국을 결속시키는 표준어와 한자음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모든 나라가 처음 세워지면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말과 글의 통일을 위해 맞춤법과 표준어를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조선도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였으니 태조 4년에 공표한 ‘대명률직해’와 ‘경제육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 쿠빌라이나 명나라 주원장처럼 문자를 만들거나 한자의 음과 뜻을 정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모든 학문의 바탕이었던 중국의 경전과 각종 서적들이 모두 한자(한문)로 이루어졌고 외교적으로는 거대한 명나라의 위압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총체적 난국 속에 피어난 한글 창제
이러한 나라 밖의 변화와 혼란이 조선에게도 엄청난 외교적 위기를 가져왔고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으로도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첫째는 한자의 발음이 문제였다. 천 년 전부터 들어온 중국의 서적들은 한자의 뜻과 발음이 여러 가지여서 한자를 사용하던 조선에서도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다. 그만큼 한자를 써서 전달하는 일은 참으로 버거운 걸림돌이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전국의 학도들이나 공직의 위정자들도 경전 읽기나 공문서 읽고 쓰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몽골족인 원나라의 한자 발음은 명나라의 발음과 매우 달랐기 때문에 원나라에서 들어온 서적과 명나라의 글들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말투도 달랐다. 이것은 외교관의 외국어 교육에 치명적 결함이 되기도 했다. 이성계의 지시로 명나라 주원장에게 간 이색이 원나라 말투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화는 유명하다.
둘째는 조선의 문자 생활이 엄청난 혼란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세 가지의 글자가 사용되었는데, 중국 글자인 ‘한자’,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쓰던 ‘구결’과 ‘이두’라는 글자가 그것이다. 구결은 유교 경전이나 불경과 같이 한문으로 된 문장을 끊어서 읽기 편하게 만든 우리 조상의 새로운 문자였지만, 한자를 빌어 만든 차자표기 문자인 구결만 가지고는 우리말을 적을 수 없다. 또 다른 문자인 이두도 역시 우리 조상이 만든 새로운 차자표기 문자지만, 구결처럼 말끝에만 쓰는 글자가 아니라 우리말 순서대로 문장을 적을 때 쓰는 문자였다. 이처럼 한문이 어려워서 구결, 이두 등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우리말을 표현했지만 이 역시 한자를 빌어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문자생활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외교문서는 원나라에서부터 쓰던 ‘이문(吏文)’ 작성법이 그대로 명나라에까지 이어져 중국어와 외교문서가 아주 달랐다.
셋째, 민본애민정책을 펼치려는 세종에게 큰 장애물이 되었다. 우리말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한문과 한자의 난해함 때문에 중앙 정부와 지방 관리들 사이에 불통이 심했고, 백성들 사이에도 학문을 배우거나 제 뜻을 전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법과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하고, 그 법과 제도를 온전히 백성에게 일깨울 수 없는 현실을 세종은 늘 고민했다.
넷째, 구습에 물들지 않은 새롭고 뛰어난 인재가 필요했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낙향하였고, 남아 있던 관료들은 혁신을 위한 의제를 내놓지 못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새로 꾸리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장려하면서 풍부한 지식을 쌓아 정책에 반영하도록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마을 표지판│홍현보
한글 창제 뒤 새로운 변혁의 시대 도래
세종대왕이 언문(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새로운 변혁의 시대가 시작됐다. 첫째, 1443년 우리 겨레는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우리만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 어려운 한자(한문) 때문에 법전도 못 읽고, 학문을 배우기도 어렵고, 임금과 신하와 백성들이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사람마다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였는데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이 누구나 다 한글로 쉽게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세종은 법전도 한글로 쓰고 삼강행실도도 한글로 써서 펴내면 많은 백성이 억울하게 옥살이도 하지 않을 것이고, 효자 충신이 줄지어 나올 것이라고 기뻐했다.
둘째,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선의 글자로 조선 왕권의 정통성을 노래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노래로 궁중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면서 조선만의 예악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의금부와 승정원 관리들에게 임금의 진솔한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넷째,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을 발표함으로써 오랫동안 혼란스럽던 한자의 발음과 뜻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당시 학문의 기초 지식이던 한자와 한문의 해독, 해득력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된 것이다.
다섯째, 이두문으로 작성해 그 내용을 잘 해석하지 못하여 관리들이 공무 수행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공문서와 사문서를 한글로 써서 정확하게 전달하게 했다. 여섯째, 학문을 위해 필수 과목인 사서삼경을 한글로 번역하라고 지시해 선진 문물과 역사, 철학 등을 모든 백성이 고루 배울 수 있게 했다.
일곱째, 일반 백성이 한글로 정치적 발언을 하게 됐다. 1449년 10월 5일, 한양 백성 누군가가 언문으로 ‘하 정승아 또 정사를 망치지 마라’라는 벽서를 써붙인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반 백성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자기의 주장을 누구나 쉽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다.
▶천지인 글자판│ 홍현보
위기를 위대한 도약으로 바꾼 역사적 전환점
한글 창제 후 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한글로 지식을 얻고, 제 뜻과 논리를 펼치며, 어렵지 않게 정부 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먼저 세종의 정책이 민본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의 표출이었기에 가능했다. 즉 논리성(Logos)과 애민성(Pathos)이 결합된 신뢰성(Ethos) 있는 지도자의 정책인 것이다. 민초들은 이 글자를 버리지 않았고, 한글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겨레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해방 후 반민주와 권위주의에 항거한 풀뿌리 민주시민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나아가 다가올 남북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전 세계 언어학자들 입에서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라는 칭송이 끊이지 않고,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로 문자생활을 훌륭히 영위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 세계적 문자가 되었다는 증거 이기도 하다.
한글이 과학적 문자라는 사실은 한국이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바탕을 갖추었다는 것인데, 이 분야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많다. 정보를 쉽게 입력하고 쉽게 수정하며, 오차 없이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은 바로 한글의 과학성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나라 안팎에서 정치, 사회, 문화, 외교적으로 엄청난 혼란과 위기를 맞았다. 중국의 왕조가 바뀌고, 지배 민족이 바뀌면서 문자생활도 어지럽고, 외교적 교섭도 어렵게 됐다. 새로운 나라 조선이 선진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온 백성이 말과 글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했지만, 중국말인 한문과 한자로는 도저히 백성들과 소통하기 힘들었고, 백성들이 생각과 뜻을 제대로 밝힐 수도 없었다. 중앙정부와 지방관리 사이에 정책이나 지시 내용이 잘 소통하지 못했고, 학문(정보)의 축적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글 창제는 세종의 뉴딜 정책이었다.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온국민이 한문 공부도, 의사 소통도, 국가 정책의 전달과 수용도 모두 쉽게 이룰 수가 있었고, 외국어 학습 능력이 높아져 외교력을 키웠다.
정리하자면, 세종의 뉴딜 정책인 한글 창제 사업이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백성 중심의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성만 생각한 세종의 과학적 발상이 우리 겨레의 문화를 세계 위에 우뚝 서게 만들었고 세계 문화사를 바꾼 위대한 업적이 되었듯이, 오늘날 코로나19로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지만 국민의 삶과 행복을 위해 국가 지도자가 새로운 결단과 혁신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 위기가 위대한 도약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홍현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