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짧은 행복’ 머문 서귀포 / 천재화가 예술혼이 피어났다

2020.10.26 최신호 보기
▶이중섭 거리의 골목 모습. 제주를 상징하는 돌 하르방과 이중섭 화가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이 함께 벽에 그려져 있다.

“골목 맞은편 초가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사는 아저씨였어요.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았어요. 가끔 골목길에서 마주쳤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도 늘 우수에 젖은 눈빛이었어요.”
6·25전쟁 때 일가족을 이끌고 제주도로 피란 온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을 회상하는 강치균(77) 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비록 당시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화가 이중섭이 준 인상은 강렬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시작된 이중섭과 강씨의 인연은 헤어진 지 70년이 됐고, 이중섭은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현실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강씨는 서귀포에 만들어진 ‘이중섭 거리’의 문화관광해설사로 관람객들에게 화가 이중섭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20년이 흘렀다. 강씨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중섭 거리를 찾은 이방인들에게 화가 이중섭에 대해 설명한 지도….
“물론 당시에는 그 아저씨가 유명한 화가인 줄 몰랐어요. 우두커니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다보곤 하셨지요.”
이중섭의 살아생전 모습을 직접 본 강씨에게 화가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가슴이 설레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당시를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동네 골목길에 남루한 차림의 일가족이 헤매고 있었어요. 6·25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이 지난 1951년 1월 중순이었다고 해요. 본토는 전쟁의 포성으로 가득했지만, 당시 제주도는 평화로웠어요. 화순항에 내려 하루종일 걸어 서귀포에 왔다고 했어요. 그 일가족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초가집 한쪽을 내준 이가 바로 동네 반장이던 송태주 어르신이었어요.”

▶이중섭이 제주 피란살이하는 동안 살았던 거주지

▶강치균 문화관광해설사가 이중섭 거주지 툇마루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쪽문이 이중섭 일가가 살았던 쪽방으로 들어가는 문

▶자구리 해변에 설치된 정미진 작가의 조형물 ‘게와 아이들-그리다’. 단란했던 시절을 표현했다.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게를 잡았던 자구리 해안

1.4평 좁은 방에서 아내, 두 아들과 거주
이중섭 거리에 들어서면 모두가 들르는 ‘이중섭 거주지’. 바로 강씨 집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제주 전통의 일자형 초가집이다. 이중섭은 이 집에서 약 11개월을 살았다. 동갑내기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어린 두 아들 태현, 태성과 함께 4.6㎡(약 1.4평)의 좁은 방에서 생활했다. 강씨는 닫혔던 이중섭 거주지 출입문을 열어준다. 좁은 부엌을 지나 이중섭 화가의 흑백사진 한 장이 액자로 걸려 있는 좁은 방을 볼 수 있다.
‘이 좁은 방에서 어찌 네 명이 살았을까?’ 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만한 좁은 공간. 세간살이는 무엇이 있었을까? 피란 생활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벽에는 이중섭 화가가 지은 시가 붙어 있다.
제목은 ‘소의 말’이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시절 릴케와 보들레르의 시를 즐겨 암송하고 시작(詩作)에도 재능이 있었다. 이중섭은 이 시를 제주 피란 때 지어서 벽에 붙여놓았다. 당시 이 시를 본 이중섭의 조카(이영진)가 “삼촌, 시도 써요?”라고 물으니 이중섭은 “그냥 소가 말한 것을 옮겨 적었지”라고 대답했다. 조카가 “소가 조선말을 참 잘하네요”라고 하니 삼촌은 “조선의 소(牛)니까”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근데 소의 눈이 예전 같지 않아.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흐려졌어…”라고 덧붙였다.
원산에서 살던 이중섭은 6·25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란 갔다. 부산은 이미 몰려든 피란민으로 붐볐고, 이중섭의 가족도 겨우 피란민 수용소에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은 날품팔이와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가족을 먹여 살렸다. 부산에 온 지 한 달여 만에 이중섭은 제주로 갈 것을 결심했다. 제주에 도착한 이중섭의 가족은 거센 제주 바람을 헤치고 사흘 동안 걸었다. 밤이 되면 외양간에서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민가에서 먹을 것을 청해 얻어먹었다. 그리고 서귀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겨우 잠자리를 마련한 이중섭은 서귀포 앞바다에 일가족을 데리고 가서 게를 잡았다.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자구리 해안가다. 강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화가 이중섭은 이 해안가에서 두 아들과 함께 게를 잡으며 놀았어요.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게를 잡고 노는 광경이 바로 이 해변입니다.”

▶이중섭 일가족이 거주했던 1.4평의 좁은 방

▶이중섭 거리의 설치 예술품. 황소와 아이들을 형상화했다.

▶이중섭 거리의 바닥에 새겨진 이중섭 그림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그림 그리기 열중
지금도 그 당시처럼 검은 바위를 돌아다니는 게를 잡으려고 관광객들이 바지를 걷고 나선다. 이중섭은 낮에 잡은 게를 집으로 갖고 와, 군인들이 사용했던 반합에 물과 함께 끓여 요리를 해먹었다고 한다. 이중섭 거리 곳곳에는 게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이중섭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자구리 해변의 앞바다에는 섶섬, 문섬, 새섬이 자리 잡고 있고,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절경이 환상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이중섭 거리를 구경한 관광객들은 이 해안에 와서 이중섭 가족이 바위틈을 헤집으며 게를 잡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해안을 보니 가슴이 아려온다. 이중섭의 곤궁함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중섭의 일평생 가족과 함께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바로 서귀포에서 1년이었을 겁니다. 비록 가난하고 좁디좁은 방 한칸살이였지만 전쟁의 공포를 잊고 아이들, 부인과 함께 단란하게 바닷가를 거닐며 살았으니까요.”
당시 이중섭은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그림을 자주 그렸다. 어린 강씨는 학교를 오가다 그림 그리는 이중섭을 발견하곤 했다. 당시 이중섭은 도화지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이중섭은 강씨의 아버지와 친구였다. 강씨의 아버지는 이중섭에게 자주 담배를 주었다고 아들은 기억한다.
“화가 이중섭은 제주도를 떠나며 아버지에게 큰 유화를 선물했어요. 어린아이가 벌거벗은 채 큰 물고기를 머리에 이고 걷는 모습도 있고….”
아마도 이중섭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앞집 친구가 고마워 헤어지는 마당에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을 선물했으리라. “그 그림 아직 갖고 계신가요?” 순간 엄청난 그림의 가치가 떠올라 강씨에게 물었다.
“아뇨, 없어요. 당시엔 그 화가의 그림이 그리 비싼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어느 날 제 친구의 삼촌이 집에 왔다가 그 그림을 가져갔어요. 아버지가 그냥 선물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삼촌은 후일 서울 인사동에 가서 500만 원에 팔았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누군가 소장하고 있겠지요.”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리의 담벼락

매년 10월 ‘이중섭 예술제’로 그의 혼 기려
그렇게 끝났던 화가 이중섭과 강씨의 인연은 서귀포시가 1995년 이중섭 거리를 만들기로 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서귀포시는 천재화가 이중섭과 그의 작품 세계를 기리기 위해 그가 잠시 살다 간 서귀포 정방동 거주지를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고, 정방동 매일시장 입구부터 솔동산까지 360m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한 것이다. 이중섭 거주지 기념표석이 세워졌고, 이중섭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이중섭 거리는 한국 최초로 화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됐고, 매년 10월 말 그의 사망 주기에 맞춰 ‘이중섭 예술제’로 그의 예술혼을 기린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한 해 평균 24만 명의 관람객이 이 거리를 찾았다.
제주에서 상업을 하던 강씨는 20년 전부터 문화관광해설사를 하며, 이중섭 거주지를 중심으로 거리를 가꿨다. 이중섭 거주지 주변의 잘 정돈된 골목길의 화단과 조경은 모두 그의 손길을 거친 것이다. 백목련과 수선화, 감귤나무 등이 이 거리에서 1년간 머물렀던 이중섭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자라고 있다. 그의 부지런한 손길이 쉼 없이 움직인다.
“이중섭의 천재성을 설명해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강씨가 이중섭 거리의 화단에 장식된 이중섭 그림 앞으로 이끈다. 엉덩이를 드러낸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게와 함께 놀고 있다. “자! 자세히 보세요. 이 아이의 팔은 두 개가 아닌 세 개입니다. 이상하잖아요. 왜 팔을 세 개씩이나 그렸는지…. 그런데 세 개의 팔 가운데 하나씩 가리고 보아도 동작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그래서 팔을 세 개 그렸어도, 전혀 생소하게 보이지 않는 겁니다.”
6·25전쟁 이후 가족과 헤어져 서울의 한 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화가 이중섭은 제주 피란 시절 우연히 마주쳤던 한 소년과 인연으로 서귀포에서 포근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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