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빗장’, 캔버스에 유화, 71×92cm, 1777년, 루브르박물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파리에서 기지개를 켠 뒤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된 데 이어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18세기 말까지 유행했던 예술 사조가 있다. 바로 로코코 양식이다. 로코코는 ‘조개껍데기 모양의 장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유(rocaille)가 어원으로 미술과 실내장식, 건축, 음악 분야까지 아우른 귀족 중심의 예술 양식이다. 이른바 상류 계층을 위한 부르주아 예술. 귀족들의 향락 문화와 사치스러운 사교 생활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발달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돈 많고 힘 있는 가진 자들의 선민의식과 쾌락 탐닉 성향은 당연히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를 선호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폼 잡기 좋아하고 그들만의 향락 추구에 몰두한 예술 사조이다 보니, 귀족들이 은밀하게 즐기던 연애를 주제로 삼는다거나 과시 욕구를 반영한 실내장식 등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유럽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성행했던 로코코 양식은 상류사회의 전유물이라는 점에서 배타적인 속성을 지니긴 했으나, 인간 내면의 자유의지와 감정을 예술적으로 분출시킨 계기로 작동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 점에서 로코코 양식은 근대미술의 여명을 알린 예술 사조로 평가받을 만하다.
경쾌하고 밝은 색채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형미,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미로 대표되는 로코코 시대 회화 부문은 앙투안 바토, 장 시메옹 샤르댕, 프랑수아 부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4인방이 이끌었다. 모두 프랑스 화가다. 이들 중 막내 격인 프라고나르의 활약은 단연 눈부셨다.
후기 로코코 풍속화의 대가
프라고나르는 18세기 귀족들의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에로틱한 연애 장면을 주로 그린 후기 로코코 풍속화의 대가다. 프라고나르의 유년기는 우울했다. 1732년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그라스에서 태어난 그는 장갑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의 아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동생이 돌도 되기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집안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져 갔다.
프라고나르가 여섯 살 되던 무렵, 가족은 고향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먹고살기 위해 대도시로 옮겨갔지만 파리 이주가 없었다면 화가 프라고나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파리행은 결과적으로 프라고나르가 로코코 회화의 거장이 되는 데 중요한 동기부여가 됐기 때문이다.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도시, 그곳에서 프라고나르는 10대 때 로코코 회화의 대선배인 샤르댕과 부셰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으며 그림 실력을 갈고닦았다. 파리행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특히 부셰는 프라고나르가 로코코 양식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그네’(1767), ‘빗장’(1777) 등 보석 같은 로코코 회화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부셰의 영향이 빠질 수 없는 이유다.
20세 때 로마대상을 수상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데 이어 21세 때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며 미술 견문을 확장한 프라고나르는 24세 때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데, 이 시기에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들을 마주하며 미래의 대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50대 중반까지 귀족들의 절대적 지지 아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프라고나르는 그러나 절대왕정에 의지한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전복시키는 시민혁명인 프랑스대혁명(1789)이 발생하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프라고나르의 후원자이자 고객인 귀족계층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귀족계급과 생사를 함께해온 로코코 회화의 운명도 막을 내렸다. 로코코 미술의 대가 프라고나르의 존재감도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그림 주문이 끊기고 로코코 양식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인간지사 새옹지마가 아닐 수 없다.
아찔한 에로틱 묘사의 연금술사
‘빗장’은 프라고나르 하면 떠오르는 그림으로 ‘그네’와 함께 후기 로코코 회화를 대표하는 쌍두마차다. 화면 속 남자가 오른쪽 위의 침실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그림 제목처럼 그림의 첫인상은 관능적이지도 에로틱하지도 않다. 그러나 화면 곳곳에 화가가 숨겨놓은 은유적 장치들을 보고 나면 왜 이 그림이 후기 로코코 회화의 정수인지, 사람들이 왜 가장 에로틱한 작품이라고 혀를 내두르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단 이 그림의 장소적 배경부터 예사롭지 않다. 황금빛에 가까운 눈부신 은색 침대보와 강렬하면서도 화려한 붉은색 비단으로 된 커튼. 가장 은밀한 사생활 공간인 침실이다. 두 남녀의 모습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남자는 왼팔로 여자의 허리춤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밀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여자의 눈이 남자의 얼굴을 향하고 있고, 그 눈빛이 촉촉한 감정에 젖어 보인다는 점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남녀는 지금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굳게 닫힌 여자의 속내를 강제로 열어젖히려는 남자의 일방적인 완력일까.
당황스러움은 남자가 오른손으로 막 걸어 채운 빗장에서 무장해제 된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라면 굳이 침실의 빗장을 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불륜이거나 겁탈로 해석되는 까닭이다. 여자의 촉촉한 눈빛에 무게를 둔다면 귀족들의 일탈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내밀한 밀회를 즐긴 당시 유럽 사회의 귀족 취향과도 일맥상통한다.
화가의 에로틱한 은유는 이제부터다. 남자의 오른손 기준 왼쪽 아래 대각선 방향의 끄트머리 탁자 위에 놓인 사과, 성서에 나오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는 과일이다. 원죄는 일탈, 불륜의 다른 이름. 은유의 rpm(revolutions per minute, 분당 회전수)은 순식간에 급상승 곡선을 그린다. 왼쪽 아래 가운데쯤 보이는 침대 모서리.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 남성의 심벌을 연상시키는데, 밝은 조명 빛 효과로 보면 볼수록 야릇하다. 화가는 마지막으로 에로틱한 은유 장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왼쪽 위에서 아래로 기다란 삼각형 모양으로 접힌 붉은 커튼 속 너머에 새겨놓은 형상. 어두컴컴한 배경 속이지만 아찔할 정도로 선명한 것이 마치 에로틱 묘사의 연금술사 같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냥 일별(一瞥, 언뜻 봄)하면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빗장’이 후기 로코코 회화의 걸작으로 불리는 이유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