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처
코로나19로 손님들의 발길이 크게 줄자 ○○시 전통시장 상인들이 모여 이대로 장사를 계속해도 좋은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대화 도중 한 상인이 “시와 운영계약 재체결일이 다가오는데 2개월 치 사용료도 미리 내야 하고 첩첩산중”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하자, 또 다른 상인이 “어디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때 막 일행에 합류한 상인회장이 “그거라면 더는 걱정할 필요 없다”며 “상인회와 전통시장 운영계약을 체결할 때 2개월 치 사용료를 미리 보증금으로 징수하도록 하는 규정이 지자체 조례에 있었으나 법제처의 권고로 최근 이 조례를 개정했다”고 말했다. 해당 조례가 전통시장 법령에는 없는 내용이므로 간단히 삭제하는 것으로 정비를 마쳤고, 전통시장 상인들은 더 이상 보증금을 낼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것이다.
▶법제처
A씨의 아들은 어릴 때 유독 공룡을 좋아했다. 장난감보다는 그림책을 좋아해 공룡이 많이 나오는 책을 선물해주는 지인이 많았다. 책은 갈수록 쌓여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무려 1000여 권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아들은 중학생이 되자 책보다는 공룡이 나오는 게임을 좋아해 책의 활용성을 잃었다. A씨는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책을 공유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이 떠올랐지만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열람석이 15석 이상 돼야 하고 매년 신규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규정을 보고 낙담했다. 하지만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 B관장에게서 “조례가 도서관 법령보다 엄격하게 적용돼 법제처에서 개선 중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시청에 문의한 결과 최근 조례가 정비돼 ‘열람석 6석 이상, 자료 1000권 이상만 갖추어도 작은도서관을 설립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듣고 그는 곧바로 작은도서관을 등록하러 집을 나섰다.
국민이 체감하는 규제혁신 전과 후
243개 지자체 조례·규칙 10만여 건 점검
법령 근거 없이 공공시설 운영 보증금을 징수하거나, 과도한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지자체의 불합리한 자치법규 2만 건에 대해 정부가 대대적인 손질에 나섰다. 이번 ‘자치법규 정비방안’은 상위 법령을 위배해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주민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지자체 조례나 규칙을 정비하기 위해 추진됐다.
정부는 2017년부터 243개 지자체(광역 17곳, 기초 226곳)의 조례 7만 9000개, 규칙 2만 4000개를 대상으로 문제점을 점검해 불합리한 조례 1만 6000건과 규칙 4000건을 발굴했다. 유형별로는 법령 위임범위 일탈(57%), 법령 개정사항 미반영(23%), 법령 미근거(20%) 등의 순이었다. 내용별로는 불합리한 행정절차가 58%로 가장 많고 영업·주민생활의 지나친 제한 23%, 과도한 재정부담 부과 9% 등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불합리한 조례 중 1만 3000건에 대한 정비를 완료했고, 남아 있는 조례 3000건과 불합리한 규칙 4000건은 9월부터 집중 정비를 추진하기로 했다. 법제처 관계자는 “지방분권이 실현되면서 의원입법 등을 통해 지자체의 조례·규칙이 상당히 많아졌다. 아무래도 중앙에 비해 법적인 검토가 부족하다 보니 상위 법령과 맞지 않는 규정도 만들어졌다”며 “법제처가 2015년부터 일부 지자체를 대상으로 실시하던 조사를 확대해 2017년부터 전수조사에 들어갔고, 행정안전부는 2017년부터 민원 다발 분야를 중심으로 집중 조사했다”고 말했다. 행안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으로 자치법규는 총 9만 9795건(조례 7만 5708건, 규칙 2만 4087건)에 이르러 1995년 민선자치가 시행된 이후 20여 년 동안 연평균 5% 이상 증가했다. 특히 조례는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정부는 지자체별 불합리한 자치법규 세부 내용을 주민들에게 공개해 지자체의 신속한 정비를 유도하고, 불합리한 자치법규가 제정되지 않도록 사전 지원·관리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번에 발굴된 불합리한 자치법규는 많은 자치단체가 비슷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공유재산 위탁 주민에 손해보험 가입 강제
강원도 A군은 자치단체 공유재산의 관리를 주민에게 위탁하면서 수탁자에게 손해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한 뒤 그 증명서 사본을 제출하도록 조례에 규정했다. 하지만 상위 법령인 대통령령은 지자체 시설물의 관리 책임은 지자체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시행령’ 제4조에 따르면 지자체장은 건물·선박이나, 공유재산 대장에 기록된 1억 원 이상의 공작물·기계 등에 대해 손해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지자체 조례로 수탁자에게 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규정을 둔 것은 법령상 근거 없는 것으로 지방자치법 제22조 단서에 위배된다. 지방자치법 제22조에는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그 사무에 관해 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 다만,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고 돼 있다. 이처럼 지자체 공유재산을 위탁하면서 주민들에게 월 70여만 원 상당의 손해보험에 가입하도록 강제하는 조례를 두고 있던 지자체는 모두 37곳에 이른다.
경기도 B시는 체육시설 관리운영 조례에 “사용 허가의 취소 또는 정지 처분된 경우 이미 납부한 사용료는 반환하지 아니하며, 사용자의 손해에 대해 배상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용 허가를 취소나 일시 정지하더라도 남은 기간 또는 일시정지 기간에 따른 사용료는 반환해야 한다. 그에 따른 손해가 발생했을 때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은 별개다. 사용자에게 과실이 있다 해도 행정청에도 일정 부분 과실이 있을 수 있어 사용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89개에 이르는 지자체들이 문화·체육시설 이용 시 일어난 과실 사고에 대해 공유재산 법령의 근거 없이 이용 주민이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었다.
충청남도 C시는 과태료 납부와 관련해 “과태료 납부통지서를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과태료 재판을 위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는 조례 시행규칙이 있다. 그러나 2008년 6월 22일 ‘질서위반행위규제법’이 시행돼 그동안 통일하지 못했던 과태료 부과·징수 절차가 일원화됐다. 이 법은 “과태료 부과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행정청에 서면으로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266개 지자체에서 과태료 이의제기 기한을 60일에서 30일로 축소한 규칙이 있었다.
강원도 D군을 비롯해 42개 지자체는 지방세 세무조사 규칙에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경우에는 조사 개시 7일 전에 통지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이는 상위법에 위배된다. 지방세기본법 제83조 제1항에 따르면 “지방세에 관한 세무조사를 하는 경우 조사받을 납세자에게 조사를 시작하기 15일 전까지 조사대상 세목, 조사기간 등을 알려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상인회가 지자체로부터 자료 제출을 요구받은 경우 10일 이내 자료를 제출하도록 규정한 16개 지자체 조례 역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시행규칙’에 따라 20일 이내 보고하도록 시정됐다.
법령 근거 없이 주민의 권리 제한하기도
법령에 근거 없이 포괄적 요건으로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도 많았다. 충청북도 E군은 민속자료전시관의 위탁 운영과 관련해 사용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 요건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이번에 정비됐다. 조례에는 ‘전시관 운영을 불성실하게 할 때’ ‘전시관 운영에 필요한 군수의 명령 사항을 이행하지 아니할 때’ 등 포괄적인 요건으로도 사용계약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상위 법령인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에 따르면 행정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사용·수익하게 한 경우, 사용 목적에 위배되게 사용한 경우, 납부 기한까지 사용료를 내지 아니한 경우 등 계약 취소 요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강원도 F시는 작은도서관 취소 사유로 “공공질서 유지나 독서 문화를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등 포괄적 요건이 포함돼 관련 조항이 삭제됐고, 전라남도 G군은 공립 어린이집 위탁운영 계약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에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해 정비됐다.
법제처 등 정부 부처는 이처럼 불합리한 자치법규를 발굴·정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된 규정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법제처의 경우 지자체가 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문의하면 검토 의견을 제시하고, 법령에서 조례로 정하도록 한 사항이 개정되면 이를 알려줘 조례 정비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는 등 자치법규가 합리적이고 적법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지원해왔다.
정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불합리한 제도가 정비되도록 지원하고 나아가 사전 차단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같은 노력으로 자치법규를 비롯한 국가법령체계를 완성해 나갈 것이다.
이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