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도량 있기에 더 빛나는 99칸 대저택

2020.09.28 최신호 보기

▶송소고택 안채 정면

▶송소고택 기왓장 위에 떨어진 감

만석꾼의 집이다. 말로만 듣던 아흔아홉 칸. 조선시대에는 민간 가옥을 아무리 크게 짓더라도 99칸을 넘지 못했다. 100칸 이상이면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되기 때문이다. 최고 권위에 도전하는 괘씸죄가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니 99칸 고택은 조선시대 최고 갑부의 집인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 99칸 고택은 전국에 세 곳. 강릉 선교장과 보은 선병국 가옥, 그리고 청송 송소고택이다. 전국에 있던 다른 99칸 고택은 사회 격변기에 불타 없어졌다. 99칸 대저택 주인이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버텨낼 수 있다. 99칸이라고 방이 99개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한 칸이다. 기둥이 가로 5개, 세로 3개가 있으면 기둥 사이가 가로 4칸, 세로 2칸으로 4×2, 8칸 집이 된다. 조선시대 일반 양반 집은 40여 칸이다.

▶안채 뒷마당의 장독대

3000평 대지에 14개 방과 3개의 우물
청송은 오지다. 지금은 도로가 발달해 오가는 것이 불편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산골 중의 산골이었다. 전체 면적의 84%가 소나무가 자라는 임야였다. 그래서 땅 이름이 청송(靑松)이다. 그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만석꾼이 탄생했고, 11대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99칸 고택을 찾아가는 내내 궁금증은 커져만 갔고, 가벼운 흥분에 휩싸였다.
송소고택은 모두 14개의 방이 있다. 3000평(9917㎡) 대지에 안채와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별채, 행랑채, 방앗간채 등이 있고, 이를 둘러싼 전체 담장의 길이가 700m에 이른다. 대문을 포함해 모두 12개의 문이 있고, 우물이 3개 있다.
송소고택을 둘러보기 전에 이 고택을 짓고, 잘 유지한 두 안방마님의 이야기부터 듣고 가자. 조선시대 영남의 부자는 경주 최부자와 청송 심씨였다.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지기 재력가였던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1862~1930)이 그때까지 살던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청송 심씨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오면서 지은 저택이다. 심부자의 재력은 9대째 300여 년간 2만 석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서 세금 납부가 5~7위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10대 재벌인 셈이다.
만석꾼은 얼마나 부자일까? 쌀 만 석은 1440톤이다. 이 정도 양의 벼농사를 지으려면 최소 800만 평의 논이 필요했고, 이는 여의도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1930년대에 전국에 만석꾼은 40명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도적 수십 명이 심씨 집을 약탈하려고 들이닥쳤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겁을 주었다. 모두 피신했다. 이때 심호택의 백발 노모가 도적들 앞에 나서 호통을 쳤다. “물건 훔치러 왔는데 집은 왜 부수는가? 곳간 열어줄 테니 가져가고 싶은 대로 다 가져가라.” 도둑들은 한 짐씩 물건을 가져갔고, 남은 돈으로 송소고택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경복궁을 중건했던 대목장이 내려왔고, 궁궐 건축에나 쓰던 적송이 동원됐다. 그때가 1880년(고종 17)이다. 13년에 걸쳐 송소고택이 완성됐다.

▶큰 사랑채 방에서 바라본 마당

▶송소고택의 철제 문고리들. 녹이 슬었지만 아직 제 역할을 다한다.

농민들에게 저리로 돈 빌려주며 부 키워
6·25전쟁 때였다. 북한 인민군이 송소고택을 접수했다. 다들 도망갔다. 안방마님 혼자 남았다. 안방마님은 인민군 지휘관과 만나 “안방은 내가 쓸 테니, 나머지는 당신들 마음대로 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안방마님의 기세에 눌린 인민군 지휘관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택은 한 달 반 동안 인민군 중대본부로 징발됐다. 그 기간 동안 인민군은 고택을 훼손하지 않았다. 다만 집에 있던 고서 3000여 권을 불태웠다. 만석꾼 집안의 안방마님 기운이 강하다.
내친김에 청송 심씨가 청송까지 온 이유를 들어보자. 조선 건국과 관련이 깊다. 청송 심씨의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고위직인 문림랑을 지낸 심홍부. 그의 증손인 형제 심덕부와 심원부 때 가문의 운명이 갈라졌다. 형 심덕부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역성혁명의 주인공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됐다. 조선 건국 이후 한성의 축성을 책임지며 출세했고, 그 후손은 조선조에서 왕후 세 명(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과 정승 열세 명, 부마(임금의 사위) 네 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동생 심원부는 정몽주 등과 관계를 맺으며 이성계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원부는 개성 근처의 산골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이때부터 청송 심씨는 심덕부 후손을 경파(京派), 심원부 후손을 향파(鄕派)로 나누어 불렀다.
그럼 낙향한 심원부의 후손인 심처대는 어떻게 만석꾼이 됐을까? 가난한 농사꾼이던 심처대는 어느 겨울날, 길가에 쓰러져 동사 직전의 노스님을 집 안으로 모시고 와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 건강을 회복한 노스님은 집을 떠나며 심처대를 근처의 산언덕으로 이끌고 가서 “이곳에 묘를 쓰면 대대로 발복할 게요”라고 말했다. 얼마 뒤 아내가 병에 걸려 숨지자 심처대는 그곳에 아내를 묻었고, 이후 일이 잘 풀리며 부자가 됐다. 농민들에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어 부를 키웠고 청송뿐 아니라 한양(서울)과 용인, 개성 등 곳곳에 땅을 사 모으며 부자가 됐다.

▶송소고택 전경. 앞이 큰 사랑채이고, 이어진 건물이 작은 사랑채다. 마당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헛담이 있다.

집 앞뒤로 산과 물이 감싼 배산임수의 전형
현재 송소고택을 관리하고 있는 심재오(66) 씨는 심처대의 11대손이다. 5세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서울로 유학 가서 직장 생활하다 20년 전에 아내 최윤희(62) 씨와 고향 집으로 왔다.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집을 비워뒀더니 수십 차례 도둑이 들어 집기를 훔쳐갔어요. 심지어 문까지 떼어갔어요. 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내려오게 됐지요.”
그는 만석꾼의 후손이다. 어릴 때 집 안에 국채 증서가 휴지처럼 흔했다고 한다. 구한말 토지 개혁하며 땅과 바꾼 증서인데 벽지로도 쓰고, 심지어 불쏘시개로 쓸 정도였다.
그의 증조부 심호택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전국에서 벌어진 의병 활동에 많은 군자금을 소문 없이 지원했고,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심호택의 아들과 손자인 심상원과 심운섭은 해방 이후 소유한 땅의 대부분을 소작농들에게 분배해 이 지역에서 최초로 자작농이 탄생했다. 9대째에서 심부자는 사실상 만석꾼에서 아름다운 퇴장을 한 것이다.
고택 뒤에 있는 사왈산의 산줄기가 고택을 감싸며 좌우 계곡의 바람과 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앞쪽의 신흥천은 고택을 둥글게 감싸면서 흘러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송소고택의 대문 위에는 전서체로 ‘송소고장(松韶古莊)’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전서를 잘 썼던 위창 오세창의 글씨다. 택(宅)이라고 하지 않고 장(莊)자를 쓴 이유는 이 집이 대저택이었기 때문이다. 

▶(왼쪽)송소고택의 오래된 나무로 만든 문 (오른쪽)고택 벽에는 생활도구가 걸려 있다.

▶송소고택을 지키는 심재오, 최윤희 부부가 큰 사랑채 마루에서 포즈를 잡았다.

일반인에 체험시설 개방 한 해 10만 명 찾아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당에 세워진 ㄱ자형의 ‘헛담’을 만나게 된다.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쌓았다. 남자들이 아녀자들이 있는 안채를 보지 못하게 설치했다고 해서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여인들도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웠는데, 헛담을 쌓아 이를 해결했다.

▶큰 사랑채 방에서 바라본 뒤뜰 담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장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담’이다. 사랑채에서 보면 구멍이 여섯 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세 개다. 신기하게도 사랑채 쪽에서 구멍을 들여다보면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 쪽 구멍에서는 사랑채가 잘 보인다. 안채 구멍 한 개에 사랑채 구멍 두 개를 45도 각도로 연결한 탓이다. 주로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뚫었다고 한다.
큰 사랑채의 기단은 3단, 작은 사랑채의 기단은 2단으로 하면서 작은 사랑채는 큰 사랑채보다 뒤로 약간 물렸다. 어른을 공경하는 의미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안채는 ‘ㅁ’자형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는 형국이다. 집 안 곳곳에 고택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골동품과 생활용품이 놓여 있다. 안채 오른편에 있는 별채는 장성한 여식이 결혼 전까지 기거하며 예의범절을 배우는 공간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높은 기단 위에 ‘ㄱ자’형 누마루를 갖춘 기품 있는 건물이다.
송소고택은 2002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 개방해 일반인이 묵을 수 있다. 2007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됐고, 2011년에는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며 청송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한 해 10만 명이 찾는다.
덕천마을에는 송소고택과 나란히 자리한 송정고택과 찰방공종택, 창실고택 등이 있어 1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소고택 앞에는 심부자 식당이 있다. 심씨의 아내가 전통 집안의 상차림으로 준비한다. 특히 송소고택 투숙객들이 애용하는 아침밥(9000원)은 인상적이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 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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