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이 스며들 수 있는 ‘투수 블록’과 빗물이 지하로 잘 스며들 수 있게 유도하는 ‘침투 측구’가 설치된 서울 은평구 향림마을의 골목길│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
도시재생 뉴딜의 모범 서울 향림마을
7월 24일 오전 10시 서울 은평구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래층 반지하 집이 침수돼 혼자 사는 여성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집 앞 하수구가 역류한 것이다. 불광2동 480번지 일대 북한산 자락에 있는 향림마을은 1990년 이전에 매설된 하수관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소화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수가 역류하는 등 민원이 잦은 곳이다. 경사로와 계단이 많은 데다 내부 도로가 협소하고 주차 공간이 부족해 거주 환경이 열악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 여관현 총괄 코디네이터는 “고지대다 보니 산에서 빗물이 한꺼번에 내려오면 하수구 용량을 초과해 아랫동네는 침수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설명했다. 향림마을 도시재생 주민협의체 전명석 대표는 “골목골목이 가파르고 경사가 심한 편인 데다, 하수구 시설에 문제가 있어 물이 잘 안 빠지고 냄새가 나곤 한다”고 덧붙였다.
2018년 도시재생 뉴딜사업지로 지정되면서 향림마을의 변화가 시작됐다. 도시재생 뉴딜은 저층 노후주거지의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혁신거점 조성 등을 통해 쇠퇴한 도심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정부가 2017년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와 주민협의체, 서대문구 등은 향림마을의 침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빗물생태마을 조성사업’을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빗물이 스며들 수 있는 ‘투수 블록’과 빗물이 지하로 잘 스며들 수 있게 유도하는 ‘침투 측구’를 설치해 강우 시 하수관의 부하량을 줄여 빗물 역류 등 침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여름철 지열과 복사열 등을 낮춰 열섬 현상(도시의 온도가 높게 나타나는 현상)도 완화할 수 있다.
이날 오전에 찾은 향림마을의 골목길에는 다양한 형태의 투수 블록과 침투 측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투수 블록과 함께 잔디 블록을 조성한 골목도 있었다. 조성 전 은평구, 도시재생지원센터, 용역업체가 함께 주민 설명회를 열어 투수 블록과 침투 측구의 디자인과 색상을 주민이 직접 결정했다. 최종 결정까지 같은 골목에 사는 주민끼리 여러 번 ‘골목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아직 바뀌지 않은 나머지 골목은 2021년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은평구청 주거재생과 김전수 주무관은 “여전히 아스팔트가 깔린 골목은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 데가 없어 바로 흘러가니까 하수관 용량이 감당하지 못해 어제같이 흘러넘친다”며 “이렇게 투수 블록으로 바꾸면 빗물을 일단 한 번 머금기 때문에 침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7월 24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 앞에서 은평구청 주거재생과 김전수 주무관(왼쪽부터), 향림마을 도시재생 주민협의체 전명석 대표,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 여관현 총괄 관리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도시재생의 중심, 향림도시농업체험원
향림마을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집들이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좁은 골목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2021년 공사 예정인 골목길에는 낡거나 파손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정원 조성사업도 함께 계획 중이다. 투수 블록이 깔린 골목길의 담장과 벽면 곳곳에 정원을 꾸미고, 마을 입구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인 ‘새장골 보호수’부터 향림도시농업체험원까지 2.3km의 탐방로를 조성해 외부 탐방객을 위한 해설 코스로 이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3년 전부터 향림마을 해설사 양성교육을 진행했다. 향림마을 해설사들로 이뤄진 ‘마을여행 스토리’ 팀은 6월 말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향림마을과 향림도시농업체험원 등을 찾아다니며 마을지도를 만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탐방로를 개척하고 앞으로 지어질 생태놀이터에서 마을의 청소년들이 즐겁게 놀며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개발할 계획이다.
향림마을 북쪽에 있는 도시농업공원인 ‘향림도시농업체험원’은 향림마을의 자랑거리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논과 토마토 심은 텃밭, 연꽃이 핀 연못이 있었다. 주민협의체 전명석 대표는 “텃밭은 은평구민에게 주말농장으로 분양하는데 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다. 체험원은 향림마을 주민들이 산책하면서 치유하는 공간이자 아이들이 생태, 농업, 자연을 배우는 소중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2022년까지 향림도시농업체험원 옆에 생태놀이터와 작은 도서관이 들어선다. 도심 속 공원인 체험관과 연계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공부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주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서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다가 도시재생 뉴딜로 생태놀이터와 작은 도서관을 옆에 조성하기로 한 거죠. 완공되면 지금보다 더 활기가 넘치고 서울에서 자랑할 만한 체험원이 될 거예요.”
현재 향림마을에는 초중고가 다섯 개나 있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용할 공간이 거의 없다. 여관현 총괄 관리자는 “학교 밖에서 아이들이 공부나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카페 말고는 이 마을에 없다”며 “자연 친화적 공간과 연계해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자치 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소년 공간인 ‘꿈트리센터’와 아이들 공간인 ‘창작놀이터’ 등 어린이와 청소년 관련 사업이 도시재생 뉴딜사업 계획안에 반영된 이유다.
주민 350여 명 도시재생 주민협의체 참여
향림마을 도시재생 사업은 도시재생 뉴딜사업 455억 원, 연계사업 65억 원 등 총 사업비 520억 원이 투입되며 사업 기간은 2022년까지 5년이다. 2019년 12월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수립을 완료하고 2020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실행단계에 들어서 어르신 공간인 ‘복지지원센터’ 등 공동이용시설과 안전골목, 새장골 주차장, 노후청사 복합화 등 생활 편의시설을 만드는 10개 단위 사업과 27개 연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18년 사업 시작과 함께 구성된 도시재생계획단은 수차례의 워크숍, 주민 설명회, 공청회를 열어 주민의 의견을 뉴딜사업 계획안에 반영했다.
사업 추진단계부터 참여한 주민들은 주민협의체를 꾸려 주민끼리 갈등을 조정하고 사업 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주민협의체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매달 두 차례 주민회의를 열고 도시재생대학 강좌, 주민공모사업 등을 통해 주민 역량 강화를 추진했다. 2019년 10월 21일부터 11월 29일까지 6주 동안 진행한 도시재생대학에 참여한 수강생 52명 가운데 15명이 수료했고 18명이 자격증 과정에서 해당 자격시험을 통과했다.
집수리 과정을 수료한 주민 김경태 씨는 “재료비 2만 원 낸 것에 비해 많은 걸 받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곳이,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게 고맙다. 향림마을의 큰 사업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봉사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민협의체에는 골목길 분과, 환경·생태 분과, 공동체 분과, 홍보·해설사 분과, 집수리 분과 등 모두 5개 분과가 있다. 향림마을에 꼭 필요한 분야들이다. 주민협의체 전명석 대표는 “분과마다 분과원이 최소 30명이고, 많은 분과는 60명까지 된다. 주민협의체에 참가하는 전체 주민은 350명 정도 되는데 다른 마을보다 인구 대비 많은 편이다. 물론 총회 때 모두 나오는 건 아니지만, 주민회의를 하면 50명 정도 꾸준히 나온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연 주민회의만 100회가 넘는다. 2020년 본격적인 사업 실행단계에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지만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주민회의 등 각종 모임이 중단됐다. “지금 꿈트리센터, 특화거리 등 여러 시설을 설계하고 있는데 주민들 입장에서 궁금하잖아요. 그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최근에는 15명씩 세 번에 나눠 진행 방향을 설명했어요. 도시재생사업은 주민이 주체가 되어 이 지역을 쾌적한 마을로 어떻게 바꿀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주민 참여가 꼭 필요하고, 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시설을 짓고 난 뒤에는 관리도 주민이 직접 해야 하고요.”
▶향림도시농업체험원 안내판 앞에서 전명석 대표가 향림마을의 도시재생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마을관리협동조합 만들어 도시재생 지속
지금 주민협의체와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의 가장 큰 고민은 2022년 말에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법정 기간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사업 기간이 끝난 뒤에도 주민이 활동을 이어가고 시설을 직접 관리하면서 지속가능한 도시재생의 구심점 역할을 할 주체가 필요한 것이다. 주민협의체는 올 연말까지 마을관리협동조합으로 체제를 변경하기 위해 현재 발기인 모집, 조합원 총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전 대표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여러 시설이 만들어지는데, 그걸 주민이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골목을 바꾼 것에 그치지 않고 골목에 사는 주민이 직접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마을에 노후한 집이 많은데 마을관리협동조합에서 싼값으로 수리,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면서 일자리를 창출해 주민의 소득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을관리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불광도시재생지원센터와 서대문구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서대문구청 김전수 주무관은 “향림마을의 도시재생이 2023년 이후에도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주민이 직접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게 행정에서 할 역할이다. 사업이 종료된 뒤에도 행정에서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전명석 대표는 “향림마을의 도시재생이 주민협의체와 행정기관, 중간 기관인 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세 주체가 서로 협조가 잘되는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 순조롭게 이어졌다”며 “목표는 마을의 이름처럼 ‘사람 향기 나는 마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마을 사람들이 살고 싶도록 쾌적한 주거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두터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을이 되기 바란다”고 희망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