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람이 어우러진 세상을 꿈꾸며…

2020.09.21 최신호 보기

▶이응노, ‘군상(群像)’, 종이에 수묵, 217×136cm, 1985

‘거리는 멀리, 마음은 가까이’. 비대면 시대가 불러온 새로운 인간관계 틀(패러다임)이다. 실제로 그래선 안 되겠지만, 왠지 어깃장 놓고 싶다.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서 움튼 삐딱한 심정이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고암 이응노(1904~1989)의 ‘군상(群像)’ 시리즈가 그것이다. 지금 같은 시국에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보면 크게 놀랄 그림임이 틀림없다. 1~2m 거리두기는커녕 수많은 사람이 개미 떼처럼 빼곡히 모여 있으니 말이다.
수묵 추상으로 기호화된 작은 인간상이 무리 지어 꿈틀댄다. 마치 서로 손을 맞잡고 어깨동무한 채 춤을 추듯 역동적이다. 널따란 광장에 모여든 군중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뛰어난 조형미 못지않게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이 작품은 고암의 대표 걸작으로 손꼽힌다.
 
‘5·18’ 당시 비통한 심정 그림으로 표현
사실 이 그림의 창작 배경에는 5·18민주화운동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고암이 고국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비통한 심정을 표출한 그림이다. 이처럼 예술가는 사회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회 현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언한다.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수많은 예술가가 작금의 시대를 고민하며 희망을 모색하고 있을 게다. 만약 지금 고암이 살아 있다면, 그의 붓끝에선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하다.
파란만장(波瀾萬丈). 파도치는 물결이 만 길 높이로 일렁인다는 뜻이다. 기복과 변화가 심한 인생을 일컬을 때 쓰인다. 파란만장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만, 고암 이응노만큼 이 표현이 적합한 인물은 드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85년 굴곡의 삶을 살다 간 고암. 그는 한국 근현대사가 낳은 예술계의 이단아이자 이방인이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여한 없이 자유롭게 예술가로서 에너지를 맘껏 쏟아낸 고암의 인생 여정을 되짚어본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김좌진과 유관순도 홍성 출신이다. 의병장이던 큰아버지는 1910년 경술국치 때 자결했고, 홍성 장터에서 3·1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어릴 때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붓을 익힌 고암은 일찍이 그림에 뜻을 품었다. 열아홉 나이에 상경, 당대 최고 서화가 해강 김규진(1868~1933) 문하에 들어가 대나무 그림을 배웠다. 일취월장하는 이응노에게 해강은 죽사(竹史)라는 호를 내려주었고, 1933년엔 사학자 정병조로부터 고암(顧庵)이란 호를 다시 받았다.
간판 사업으로 돈을 모은 이응노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서양화와 일본 남화를 두루 익혔다. 1945년 해방 몇 달 전 귀국해 전업 작가로 활동하다 1948년엔 홍익대 교수, 1954년부턴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 기간에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관전(官展) 격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선 철저히 차별받고 소외당했다. 학벌, 파벌, 지방색, 성격 등 복합적 이유에서였다.
이에 고암은 국전 추천작가 사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1958년 3월 개인전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해 은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예순 나이엔 서양인에게 동양화를 가르치는 학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대전에 있는 이응노 미술관 전시장

시대정신이 반영된 예술가의 삶
이런 승승장구에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된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불리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시인 천상병,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해 많은 지식인이 함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정부는 이응노를 국내로 초청했다. 해외에서 민족문화를 선양한 공로자로 선정됐다는 명분이었다.
이에 응해 귀국한 이응노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체포당했다.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와 안양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방에서 식사로 나온 밥풀을 모아 종이와 섞어 입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2년 반 만에 석방된 고암은 고향 근처 예산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잠시 머물며 암각화를 남기고 다시 홀연히 프랑스로 돌아간다.
그 뒤 또 다른 세파에 휘말린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의 ‘북한 납치 미수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1977년 일이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며 국내에서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79년 유신체제의 종말과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타국 땅에서 겪은 고암은 결국 한국 국적을 버리고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고 만다. 그사이 국내외 세상은 급변했다. 1989년 1월 1일, 당시 <중앙일보> 사옥 1층에 있던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개막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개막일 열흘 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대전청사 맞은편 대전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이응노미술관이 있다. 고암 작품이 상설 전시되는 공간이다. 더불어 홍성엔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도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미술관 건축과 주변 조경이 아주 훌륭하다.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했다. 개인적으로 국내 미술관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일상이 회복되면 꼭 방문해보길 권한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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