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특정한 날을 기념해 기억하려 한다. 생일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도 특정한 날을 기념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과 소속감을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를 우리는 흔히 정체성이라 말한다.
정체성은 공감과 유대의 범위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진다. 재일 코리안처럼 여러 층위의 경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계선을 따라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안과 밖의 구별 방식은 일상에서도 흔히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례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2019년 한국인 사회의 모습을 들 수 있겠다.
2020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20년은 1920년 독립군이 승리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00년 전 일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이 전투 당시와 같거나 오늘날 모두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치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폭동’으로 규정한 조선인도 있었지만, 운동 또는 혁명으로 부른 사람도 있었듯이. 또 한국인은 그냥 3·1‘운동’이라 말하지만, 일본인과 중국인은 3·1‘독립운동’이라 기억하듯이.
1960년대 후반 들어서야 두 전투 기억
기억은 시간과 존재의 처지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모든 기억은 유기체이며 현재의 시제를 반영하면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존재를 불러 미래를 말하려고 한다. 기억은 개인과 집단, 국가를 구별하지 않고 역동적이다. 특히 국가나 민족의 기억은 학교와 사회의 교육으로 창조된 사례가 매우 많다. 국가와 민족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과 다를 수 있고, 개별 사실과도 다를 수 있다. 기억 자체가 하나의 신념 체계로 독립된 생명력이 있으면서 집단의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2020년 100주년을 맞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관한 우리 사회의 기억도 그렇다. 두 전투가 일어났을 당시 <독립신문>에 보도된 봉오동전투는 삼둔자전투로 대표되었다. 최진동과 홍범도가 지도자로 거명되다 어느 순간부터 홍범도의 이름만 <독립신문>에서 호출했다. 청산리전투도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 군대의 보고서가 그때부터 최근까지 우리의 기억을 지배해왔다.
주권국가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두 전투에 대한 기억이 더 심각했다. 해방 후 20년이 넘도록 두 전투에 관한 국민의 기억은 없었다. 국가는 기념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잡지 등에서 공공연하게 다루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일본이 재침략한다는 위기의식이 한국 사회에서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언급은 북한과 체제 우월성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1970년대 들어 그에 맞대응하는 움직임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학교 교육은 이를 실현하는 가장 광범위한 공간이었다.
학교 교육은 독립군의 희생적인 싸움과 더불어 봉오동전투를 홍범도가, 청산리전투를 김좌진이 지휘했다고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이 구분법은 21세기 초반까지도 유통된 기억이다. 반면 북한의 역사 교육은 홍범도까지만 언급한다. 김좌진이 없고 청산리전투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방점이 있다. 남북한의 인식 차가 곧 분단시대 역사 인식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름 없는 독립군과 민초의 연대 주목해야
1990년대 들어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고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홍범도에 관해 새롭게 알려질 기회가 생겼다. 그가 소련공산당에도 입당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고국을 그리워하다 크질오르다라는 곳에서 1943년 순국했다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두 전투의 영웅을 분배하듯 나누는 한국 사회의 기억 방식도 21세기 들어 해체되었다.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지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기억은 독립군이 어디서 어떤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전투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두 전투가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구상하고 있던 ‘독립전쟁’의 일환이었다고 밝혀진 사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홍범도와 김좌진만 영웅으로 기억하는 영웅사관을 극복하고, 두 영웅의 지휘를 받은 이름 없는 독립군과 이들을 도운 민초에 주목하는 시선까지 동반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모두의 독립전쟁이었다고 확장적으로 기념하고 기억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걸출한 두 지도자 외에도 이름 없는 독립군과 민초가 연대했다는 관계성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1920년 독립전쟁론이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통합성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동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에서 두 전투를 해명하려는 넓은 시야도 부여잡아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와 독립군, 민초, 임시정부라는 세 층위의 움직임이 동아시아 지역의 역동적인 정세와 맞물려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함으로써 당시 세계 제3위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는 승리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분단 극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